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지난 주말 아침이었다. 세탁기가 돌아가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통상 적으로 세탁기 판 위로 써지는 에러 메시지도 없었고
탈수구가 막힌 것도 아닌데 어찌 된 영문인지 빨래를 담은 세탁기는 미동도 없었다.
보통 빨래를 할 때면 세탁물을 넣고 세제 넣고 용도에 맞게 프로그램을 설정하고 시작 버튼을 가볍게 누른다.
그러면 덜그럭 탁 하는 문 잠기는 소리와 함께 슈와 하는 물들어 가는 소리가 나고 빨래가
돌아가는 모습을 유리문을 통해 보고 남은 세탁 시간을 확인하고는 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었건만 일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켜져 있는
세탁기는 얼음땡을 하듯 그대로 멈춰 서서 남은 세탁 시간도 변하지 않은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전원을 모두 끄고 콘센트를 뽑고 기다렸다가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켜면서 다시 다 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 가지.
난감했다. 그간 감기를 앓느라 차곡차곡 채워둔 빨래통이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은 원래 빨랫감이 금세 쌓인다. 날이 더워 자주 씻다 보니 수건이며 속옷 양말 옷들도 많이 나오고
침대보랑 이불보도 더 자주 세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겠는가 빨래방이라도 가야지, 저대로 빨랫감을 쌓아 두고 살 수도 없고
저 많은 빨래를 손으로 빨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이미 여러 자체 언급된 바 있지만 독일에서는 당일 해결 되는 서비스는 찾기 어렵다.
특히나 기술자님을 모셔 와야 하는 일은 그쪽에서 시간이 되는 날에 맞춰야 한다.
세탁기를 산 지도 오래됐고 이미 애프터서비스 기간도 지났다.
있다 해도 금방 와 주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전화통 붙들고 실랑이하다 운 좋아 고객센터와 바로 연락이 된다 해도 경험상 기술자 출장은 빨라야
그다음 주 또는 2주 뒤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뭐든 미리미리 예약하고 날짜를 잡아 둬야 한다.
근데 누가 어느 날 갑자기 멀쩡하던 세탁기가 고장날줄 알았느냐 말이다.
세탁기 관련 웬만한 건 샐프로 해 왔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이번엔 기술자가 나와 줘야 되지 싶다.
색색의 비닐 쇼핑백에 빨래들을 흰 빨래, 컬러, 수건, 침대보... 종류 별로 나눠 담으며
"주인아줌마 아팠다고 니도 아프냐? 뭐!,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딴 거냐?" 며 때 지난 남의 대사 읊으며
세탁기 타박을 해 봐야 장승처럼 서 있는 그것은 움직일 맘이 없어 보였다.
남편과 자동차에 빨랫감을 바리바리 싣고 어쩌다? 세탁기가 고장 나거나 이불이나 커튼 같은 큰 빨래를 해야 할 때 가는 미나 이모네로 출발했다.
(진짜 이모네가 아니고요 독일 빨래방 이름입니다ㅎㅎ 궁금한 분들을 위해서 :독일의 빨래방 미나 이모네)
운 좋게도 딱 빨래방 앞에 주차를 했다 그곳은 집에서 가깝다는 장점이 있지만 주차장이 따로 없고 빨래방 앞에 서너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자리만 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주차할 곳이 없어 한참 먼 곳에 자동차를 주차해 둔 적도 있다.
그런 날은 빨래가방을 들고 다니다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이 빵조각으로 길 찾는 표시를 해 두듯
하얀 양말 한 짝, 까만 빤쥬하나, 수건 하나.. 작은 빨랫감 들로 길을 만들며 다닌 적도 있다.
빨래방 문 앞에 앗싸! 를 외치며 주차하고는 빨래 가방들을 들고 미나 이모네 문을 열렸는데
문 앞에 턱 하니 주인장이 쓴 것으로 보이는 손글씨 종이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기술적인 문제로 오늘 휴업하오니 손님분들은 많은 양해 부탁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여기마저 기술적인 문제면 어쩌란 말인가
난감하네~~! 를 외치며 빨래 가방들을 다시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있으려니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찾았다는 듯이 두 눈을 반짝이며 남편이 말했다.
"그럼 우리 베저토어로 가자!"
나는 마빡에 저절로 주름을 잡으며 다시 물었다
"진짜? 꼭 그래야만 할까?"
베저토어 라 하면 우리 동네 지역 이름인데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위험 구역 중에 하나 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독일의 중부의 중소 도시 다.
매일 사건 사고가 다반사인 대도시에 비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지만
그렇다고 사건 사고가 전혀 없는 곳은 아니다.
간혹 살인 사건도 일어나고 강도, 도난, 폭력 사건도 터진다.
그중에서도 단골로 오르내리는 지역들이 있다.
주로 망명자, 난민등의 이주민들과 사회 취약계층들이 포진해 있는 곳들인데
베저토어도 그런 지역 중에 한 곳이다.
그렇다고 낮에 지나다니기도 섬찟한 그런 곳은 아니다
독일은 정책적으로 미국의 할렘 같은 치외법권 지역을 따로 만들지 않기 위해
취약계층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을 따로 떨어 뜨려 놓지 않고 섞어 두기 위해 애쓴다.
말하자면 요주의 지역인 노른자 주변에 흰자를 크게 포진시키듯 여러 계층을 섞어 두는
일명 계란 프라이 지역들이 많다(* 요 이야기는 나중에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변에 초등학교 고등학교 들과 대학 건물들도 여러 개 있고 교회와 시에서 하는 문화센터 들도
여러 곳 있다.
예전에 시에서 하는 정부 교육 지원 프로젝트에서 유아 미술반을 담당한 적이 있어
몇 년간 매주 오간 적도 있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 독일 유아들과 함께 친환경 미술교육)
오며 가며 지나다니다가 보기는 했지만 베저토어의 빨래방은 생각보다 컸다.
일일이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7kg을 세탁할 수 있는 보통의 세탁기만 30대가 넘게 비치되어 있고 15kg 빨래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XXL 세탁기도 10대는 되어 보였고 건조기 또한 넉넉히 놓여 있었다.
또 우리가 다니던 미나 이모네는 무인 코너였지만 이곳은 세탁기와 건조대를 관리하고 있는 기골이 장대한
아저씨 아르바이트생 들이 두세 명은 되어 보였다.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도난 사건 등을 방지하기 위한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동네에 대한 선입견 탓인지 크고 깨끗했으나 왠지 빨래방 분위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게다가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 평범? 하지 않은 몽타주 들도 눈에 띄여서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비주얼도 심상치 않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비어 있는 세탁기 두 곳에 빨래를 채우고 세탁기를 작동하기 위해 키오스크 앞에 줄을 섰다.
독일은 버커킹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을 제외하고는 아직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는
식당이나 상점이 많지 않다.
그러나 빨래방은 몇 년 전부터 한국의 키오스크 비슷하게 되어 있었다.
다른 것이라면 카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현금으로도 결재가 된다는 거다.
마치 분식집에서 김밥이나 떡볶이를 주문하듯 터치 스크린에 빨래의 선택 사항을 누르고 종이돈이나 동전 또는 카드로 결제를 하고 세탁기에 시작을 누르면 끝~~!
오래 걸릴 게 없는 키오스크 앞에서 나는 왠지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앞에 선 두 명의 범상치 않아 보이는 남자들 때문이었다.
맨 앞에 서서 키오스크를 뚜러질 듯 노려 보다가 주변을 다시 서성이던 남자는 40대 에서 50대 사이로
보였다.
언제 물 구경을 했는지 알 수 없는 떡진 긴 갈색 머리에 그 옷도 같이 빨아야 하지 않겠소? 싶게
색깔 구분이 어려운 꼬지리한 반바지와 티셔츠.
아침에 해장술이라도 한잔 하셨는지 붉게 물든 낯짝과 무엇보다 수시로 희번덕 거리는 눈빛과
흔들거리는 걸음걸이가 매우 사납고 위험해 보였다.
떡진 머리남은 뭐가 잘 눌러지지 않는지 키오스크 화면에 같은 자리를 신경질 적으로
반복해서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흡사..
날씨 좋은 날 시내에 다니다 보면 술병 하나 들고 혼자 허공에 삿대질하며 소리 지르던 사람들과
닮아 있었다.
그러니 "아저씨 뭐 하세요?" 또는 "얼마나 더 걸리세요?"라고 따지거나 묻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빨래방의 위치가 그 동네라는 것도 그 사람의 상태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날은 덥고 마냥 기다리고 서 있자니 슬슬 짜증이 밀려오려 할 때였다.
그 떡진 머리남이 자기의 긴 손가락에 골고루 침을 묻히더니 키오스크 화면을 꼭꼭 눌러 대는 게 아닌가?
마치 침 묻은 손가락으로 현금을 세듯이 야무지게도 말이다.
안 그래도 찜찜했는데 다른 사람도 사용해야 할 화면에 골고루 침까지 묻혀 주다니 말이다.
우웩 소리가 절로 나왔다.
띠발! 알바 아저씨한테 키오스크 화면 좀 닦아 달라고 할까? 손가락에 휴지 감고 누르면 눌러지려나?
그다음 차례인 할아버지가 사용 나면 닦아져서 괜찮으려나?
떡진 머리남의 만행에 진절머리를 치며 나름 대책 마련을 하고 있는데
내 바로 앞에 할아버지 차례가 되었다.
한 손은 벗어 질듯 아슬하게 걸려 있는 바지 위 허리춤에 얹고 벌벌 떨고 있는 다른 손에 들려 있던 5유로짜리 지폐를 엉뚱한 곳에 밀어 넣으려 애쓰던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빨래방에 처음 와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 드려야 하나? 하고 있는데 아까의 그 떡진남이
다시 바람 같이 나타났다.
할아버지에게 빨래를 넣은 세탁기의 번호가 몇 번인가 묻고는
아까와는 다르게 날렵하고 나이스한 손짓과 말투로 하나하나 누르는 것과 방법을 할아버지에게 쉽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드렸다
그럼에도 잘 못 알아듣는 할아버지에게 다시 천천히 설명을 해 드리는 떡진 남은 마치다른 사람 같았다.
덕분에 간단하게 키오스크를 섭렵하게 된 할아버지는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떡진 남은 할아버지에게 세탁기에 세제와 섬유유연제는 넣어 두셨냐고 물었고 예상했던 대로 오늘 빨래방이
처음이라 미처 챙기지 못했다는 할아버지에게 떡진 남은 조금 남았노라며 자신의 섬유유연제를 나누어 주었다.
덕분에 빨래에서 좋은 냄새나겠다며 너무 고맙다는 할아버지의 해맑은 인사에
떡진 남은 까맣게 썩어서 남은이가 몇 개 되지 않는 입매를 활짝 끌어올리며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아까의 그 살벌한 인상의 위험해 보이는 남자는 어디에도 없고 조금 지저분해 보이지만 수더분한 동네 아저씨의 모습만 남아 있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동네의 이미지가 남다른 비주얼에 얹어져 내 상상의 나래에 날개를 달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위험한 사람이 아닌 그저 평범한 동네 아저씨 일지 모른다
나도 모르게 느슨해진 입매 따라 즈레 쫄아서 굳어 있던 어깨도 함께 스르륵 풀어진다
화창한 주말 기분 좋은 반전을 만난
빨래방 에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