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얻은 후 매일 이곳으로 출근했다. 업무도 보고, 혼자 밥도 먹고, 드라마 정주행도 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꿈만 같았다. 혼자 떠난 여행자의 자유로움을 온종일 만끽하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는 웃고 있든, 울고 있든, 멍 때리고 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게 이곳은 감정을 감출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매우 슬플 때면 석양을 바라보았다던 어린 왕자가 어느 날은 마흔네 번이나 해가 지는 걸 보았다는 문장을 읽었을 때. 내 심장은 어린 왕자의 슬픔보다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그의 자유에 공명했다.어린 왕자는 자신의 슬픔을 누군가에게 들키지는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행성에는 오로지 자신뿐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슬픈 건지도 몰랐지만, 나에겐 자신의 행성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달랠 수 있는 어린 왕자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네 명이 함께 사는 집에서는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조용히 울음을 삼켜야 했다. 아이들에게만큼은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의 슬픔이 불행으로, 그 불행이 자신들의 탓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길 바랐다. 대신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없이 울거나 화장실에서 눈물을 씻어냈다.
꺼내놓지 못하는 슬픔은 소화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안으로 삼키면 삼킬수록 단단해지고 굳어졌다. 살려면 뱉어야 했고, 그래서 붙잡은 일이 글쓰기였다. 덕분에 감정의 응어리들은 잘게 부서지고 흩어졌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감정의 부침은 여전히 일어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이곳에서 그 감정들을 직접 마주하고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문제는 함께 해결해야 하지만 감정은 개인의 몫이니까.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 중 가장 좋은 때는 햇볕이 잘 드는 시간에 식탁에 앉아 혼자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는 것.
이곳에서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 오전이 어느새 오후가 되고, 오후인가 싶으면 금세 해가 저문다. 점점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건 당연지사. 해가 지기 전에 들어간 첫날과 달리 이튿날부터는 밤을 훌쩍 넘겨 귀가했다. 막차를 타고 들어가기도 하고, 막차마저 놓친 날은 네 정거장 거리의 집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대학에 막 입학한 큰 아이가 보이던 귀가 패턴과 비슷했다. 아이도 나도 20년 만의 자유에 가속페달을 밟은 느낌이었다.
결국 일주일 만에 외박을 했다. 의뢰받은 강의 자료를 만드느라 늦어진 탓도 있었지만, 침실까지 마련해 놓고 굳이 여기서 안 잘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일까지 담당자한테 PPT를 보내줘야 하는데 아직 안 끝나서. 마무리하려면 새벽까지 일해야 할 거 같아. 오늘 작업실에서 자고 내일 들어갈게."
"응. 그렇게 해. 집에도 못 들어오고. 고생이 많네."
남편은 일 때문에 밖에서 잔다는 소리에 고생이 많다며 안쓰러워했다. 일이 많거나 피곤한 날 사무실 한편에 접이식 간이침대를 놓고 자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날 새벽 4시쯤 자료를 마무리하고서야 잠자리에 누웠다. 침대 프레임이 도착하지 않아서 매트리스만 깔고 자야 했지만 집이 아니어도 잘 데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집 밖에 잠자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매트리스만 깔려 있을 때라 방이 휑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남편과 싸우고 갈 데가 없어 아장아장 걷는 큰 아이의 손을 잡고 찜질방에 가서 잤던 날이 지금도 기억난다. 결혼식 때도, 아이들을 낳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그때는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엄마는 왜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는지, 언니는 또 왜 이리 멀리 사는지. 힘들 때 보따리 싸서 갈 친정식구 하나 옆에 없다는 게 아프고 서러웠다.
나는 어쩌다 집을 놔두고 이렇게 따로 공간을 얻었을까.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 공간에 담긴 것이 단순히 취향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잊어버린 줄 알고 지냈던 여러 순간들이 결국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감정과 기억들이 모여 나를 이곳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을 남편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기에 세탁기와 가스레인지와 침대까지 있는 작업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은 매일같이 이곳으로 출퇴근하는 나를 보고 이곳에 와보고 싶어 했다. 재촉하진 않았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기서 일을 한다고 하면, 집에 들어가는 길에 태우러 오겠다는 말을 여러 번 꺼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이 남아있으니 먼저 들어가라며 에둘러 말했다.
사실 나는 이곳에서 다가올 남편의 생일파티를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과도 공유하겠다고 마음먹고 만든 공간인데, 가장 가까운 가족의 방문을 계속 미룰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공간을 독립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도 가족들의 인정이었기에 어차피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할 일이었다. 일하는 공간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먹고 자며 생활하는 독립적 공간으로 인정받으려면 무엇보다 남편의 공감과 동의가 꼭 필요했다.
어느 주말 오후. 박사과정 지원 서류를 준비하는 와중에 남편의 연락을 받았다. 역시나 이곳을 와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생각에 이쪽으로 오라는 말과 함께 주소를 알려주었다. 드디어 남편에게 공간을 오픈할 생각을 하니 서류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달달 떨며 초조한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렸다.
전화를 끊은 지 20분쯤 지났을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남편이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던 남편의 눈이 이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남편의 감탄사.
"여보~ 여기 너무 좋다! 신혼집 같아!"
응? 뭐라고...? ⓒEBS
남편은 주방과 넓은 테이블이 있는 큰 방을 보고 나서 침실문도 열어보았다. 그리곤 내가 구입한 싱글 침대를 보더니 한 번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완전 신혼집이네! 그냥 여기서 둘이 살아도 되겠는데?"
(아니야.. 아닌데.. 혼자 살 건데?)
나의 공간 취향이 신혼 분위기의 인테리어로 비치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남편 눈에는 이곳이 '30년 된 다세대주택에서 찾은 우리만의 러브 하우스'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만약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남편에게 하는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면 대성공이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빨리 분위기를 전환시켜야 했다.
"여보, 차 마시자."
나는 침실을 둘러보는 남편을 끌고 주방으로 안내했다. 방을 나와 고개를 좌우로 살피던 남편이 물었다.
"여기 몇 평이야?"
"응? 14평"
"딱 좋네"
(뭐가? 뭐가 딱 좋아?)
나는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컵을 꺼내면서 열심히 짱구를 굴렸다. 남편과 내가 함께 이 공간에 머물 수 없는 이유, 그걸 찾아야 했다. 최대한 빨리. 그때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단어가 떠올랐다.
제사!
우리는 제사를 모시는 장손과 맏며느리 아닌가.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린 티가 나지 않도록 느긋한 어투로 말했다.
"여보, 애들도 다 크고 우리 둘만 산다고 생각하면 요 정도가 좋긴 하지.(우선 인정)"
"그래! 여기 아담하고 너무 좋은데?"
나는 티백을 넣은 컵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말했다.
"근데 여보, 우리는 제사를 지내야 되잖아. 어머님, 고모님, 작은 아버님, 동서네까지 다 모여서 지내는데 이렇게 작은 집에서 어떻게 지내?"
"그렇긴 하지."
"그래, 우리가 제사만 안 지냈어도 이런 집에 둘이 살면 딱 좋지. 관리비 안 내도 되고, 청소도 편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