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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y 11. 2023

아내의 싱글 침대에서 잠드는 남편의 마음

이게 별거가 아니면 뭐야?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작업실"

"있다가 퇴근하고 잠깐 들를까 해서. 차나 한 잔 마시려고."

"어.. 알았어."


별다른 용건이 없는 남편의 느닷없는 방문이라. 지난번처럼 신혼집 같다는 말을 또 꺼내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온다는 사람을 말릴 수는 없었다. 그저 차만 마시고 금방 일어나길 바라는 수밖에.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차만 마시고 일어날 줄 알았던 남편은 2인용 소파를 차지하고 스마트폰과 혼연일체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침실로 들어가더니 한참이나 업무 관련 통화를 했다. 전화를 건 상대방과 의견이 좁혀지않는 건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통화가 빨리 끝나야 남편도 일어날 텐데.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통화 내용에 누군지도 모르는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방이 조용해졌다. 통화가 끝난 모양이었다. 음...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거실로 나오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찜찜했다. (설마 내 예쁜 싱글 침대에서 잠이 든 건 아니겠지?) 살금살금 걸어 가 방문을 열어보았다. (슬픈 예감 적중률 100%)남편은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대각선으로 누워 있었다. 난감했다. 내 침대에서 내려오라고 잠든 사람을 흔들어 깨우기도 그렇고. 그래도 함께 산 세월이 얼만데. 침대 때문에 너무 매정하게 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조용히 문을 닫으려는데 눈을 뜬 남편이 손짓을 했다.


"잠깐 와서 누워 봐."

(뭐어!?)


나는 밖에서 방문 손잡이를 잡은  말했다.


"아니야, 당신 피곤하면 한 숨 !"


그리곤 황급히 문을 닫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벌렁거렸다. 세상에. 와서 누워 보라니. 아무리 우리가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다지만 이 무슨 설렘도 낭만도 없는 망발인가. 연애하던 시절에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섬섬옥수 같다며 칭송하고 나의 눈동자에 별이 빛난다는 시를 써주던 풋풋한 청년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는지. 야속한 세월이 남편의 감수성을 다 갉아먹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잖아...)


유튜브 보기. 큰 소리로 통화하기. 소파든 바닥이든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기. 이곳에서 보이는 남편의 행동은 집에서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같은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남편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편치가 않다. 엄마나 아내, 며느리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고유성을 되찾기 위해 만든 특별한 공간이 남편만 오면 평범한 살림집처럼 변하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혼자 읽고 쓰고 공부할 때는 '안녕'이라는 개인일 수 있지만 남편과 함께 하는 순간에는 그저 한 사람의 아내일 뿐이라는 느낌. 어쩌면 당연한 그 사실이 남편의 존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사이 집에서 듣던 익숙한 비트가 들렸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였다. 그대로 두면 몇 시간 동안 일어나지 못할 수준의 데시벨이었다. 남편을 저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남편을 깨웠다. 또 옆에 누워보라는 헛소리를 하면 못 들은 척 무시할 참이었다.


"여보. 너무 오래 자면 밤에 못 자! 이제 일어나."


남편이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당신이랑 얘기 좀 하려고 했는데 잠이 들었네. 잠깐만 앉아 봐."

(자다 깨서 얘기는 무슨 얘기?)


솔직히 남편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남편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급한 거 아니면 집에 가서 얘기해."


나는 남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조금 격앙된 톤으로 덧붙였다.


"당신이 여기 있으니까 내가 집중이 안 돼서 그래! 그냥 먼저 집으로 들어가면 안 돼?"


잠시 후 마지못해 일어난 남편이 가방과 휴대폰을 챙겨 들고 나섰다.


드디어 남편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안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얘기나 좀 하자는 사람을 쫓아내듯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했을까. 하지만 어렵게 쟁취한 자유와 독립을 사수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그의 마음까지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땐 몰랐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 놓인 아내의 침대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이 어떨지. 앞으로 누릴 자유에 도취되어 그가 겪을 상대적 박탈감 따윈 안중에도 없었으니까. 피곤하면 눈이라도 붙이고 가라는 빈말조차 하지 않는 내게 남편이 느꼈을 감정. 그것을 헤아리지 못한 결과가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를.




그날 이후. 남편의 태도가 180도 변했다. 집에서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잘 걸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얼마간 집 안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딱히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는 남편 때문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며칠 후 다시 작업실을 찾은 남편이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완전히 가라앉은 목소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번엔 막무가내로 남편을 쫓아내는 게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남편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나 역시 굳은 얼굴로 그의 옆에 앉았다. 살짝 고개를 떨군 남편이 먼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당신은 이 공간을 왜 얻었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라고 대답하지?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까마득했다. 정체성을 잃어가는 느낌에 숨 막혔던 기억들. 내가 누구인지를 찾기 위해 버둥거리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들이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를 어떻게 길어 올려 이곳에 데려다 놓았는지. 그 밤들을, 그 눈물을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과거의 기억 속에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자기 연민의 잿더미를 굳이 파헤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 순간들은 입 밖에 꺼내면 여전히 희석되지 않은 상처의 조각들이라는 사실만 분명해질 뿐이었다. 내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친 기록들은 나조차 읽지 않는 오래된 폴더 속에 화석처럼 그대로 남겨두는 편이 나았다. 그럼에도 남편의 질문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만으로도 버겁던 그 시절의 가여운 나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내가 침묵하자 남편이 냉소적인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여긴 그냥 작업실이 아니잖아. 이게 별거가 아니면 뭐야? 당신이 생각하는 다음 순서가 대체 뭔데?"


뭐라고? 방금 전까지 아득한 기억 속을 헤매던 나는 '별거'라는 단어에 현실 세계로 끌려왔다. 별거? 우리 관계가 나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따로 떨어져서 얼굴을 안 보고 사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다음 순서라니? 남편이 예상하는 다음 순서야말로 뭐길래 저렇게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우리가 헤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과민반응하는 남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나 답답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남편에 빙의해 이 사건을 재구성해 보았다.


어느 날 아내가 작업실을 얻었다며 짐을 싸서 나갔다. 작업실에 보니 이곳은 그냥 일반적인 작업실이 아니다. 가스레인지에 세탁기에 옷장과 침대까지. 그냥 살림집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나의 방문을 어찌나 경계하는지 내가 가기만 하면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다. 아내는 이곳에서 혼자 밥 먹고 일하고 잠도 잔다. 이게 별거가 아니면 무엇인가.  


음.. 그러네. 별거 맞네. 헤어지기 위한 별거는 아니지만 따로 떨어져 산다는 사전적 의미로만 보자면 백퍼 별거가 맞았다. 아무리 버스 네 정거장 거리여도 집이 다른 건 다른 거니까. 따지고 보면 공간 독립이라는 정의는 당사자인 나에게만 유효할 뿐. 보편적 관점에서 보면 작업실을 가장한 별거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작업실을 얻겠다고 했을 때 남편이 흔쾌히 받아들인 것도 그냥 출퇴근용 사무실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지, 이런 스타일의 거주용 작업실이었다면 손사래를 쳤을 게 틀림없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독립할 거라고 했던 말이나 작업실에서 잘 수도 있다는 말 같은 건 남편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랑 여기를 공유하겠다고? 사람들이 보고 뭐라고 하겠어?"


친구나 친척, 동료, 그 외 누구라도 이곳을 와 본다면 우리 부부가 별거한다고 소문이 날 테니 아무에게도 이 공간을 오픈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잘 모르는 이들 사이엔 안주거리가 될만한 일일 수도 있으니 남편의 말이 아주 비약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디서 뭐라고 떠들지 모를 남들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남편의 오해부터 푸는 게 급선무였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줄 몰랐어. 이제 아이들도 크고 했으니까 엄마나 아내, 며느리에서 조금 벗어나서 내 인생에 집중해보고 싶었어. 그래서 공간을 얻은 건데... 당신 마음 다치는 거는 생각을 못했네.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근데 여보, 나는 당신이랑 헤어질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어. 이게 별거라고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어. 요즘은 이렇게 주택에 오피스 기능을 결합한 작업실에서 생활하는 예술가나 프리랜서들도 많아. 내가 미리 잘 설명해줬어야 했는데. 의도를 말로 잘 전달하는 게 어렵게 느껴져서. 보지 않고서는 모를 것 같고. 그래서 그냥 작업실이라고 말한 거야."


나름대로 설명을 한다고 했지만 생채기난 남편의 마음은 쉬이 달래 지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미 나 모르게 다 저질러놓고.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지금 두 집 살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첫 방문 때 신혼집 같다며 좋아하던 남편이 이제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공간을 얻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내가 보인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자신을 밀어낸다는 느낌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게 분명했다. 내가 남편을 밀어냈던 건 나의 자유에 대한 과잉대응 때문이었지, 당신이 싫거나 미워서가 아니라는 믿음을 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 관계에 대한 굳건한 믿음 없이는 이 갈등의 실마리를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미리 마음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해. 당신 마음이 불편하다면 다른 사람들하고 (일단)공유는 안 할게. 나한테는 당신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 진심이야. 바쁠 때만 여기서 자고, 그 외엔 집에서 출퇴근하도록 할게."


한 발 나아가기 위한 두 발 후퇴. 나는 예전처럼 남편의 말 몇 마디에 상처 입고 눈물 콧물 쏟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원하는 목적을 성취하려면 전략이 필요하고,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물러서야 할 때도 있다는 걸 알만큼 약아졌다. 그리고 남편 역시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다. 늘 나의 선택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던 사람이니 진심만 잘 전달되면 풀릴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잠시 남편이 침묵했다. 살짝 기분이 누그러진 듯했다. 그 틈을 타 남편의 마음을 슬쩍 떠보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많이 미워?"


남편이 작은 한숨을 내쉬고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그랬으면, 내가 여길 왔겠어?"


예상이 맞았다. 남편은 이 공간이 싫었던 게 아니라 마치 자신의 성을 방어하는 듯한 나의 태도가 서운했던 것이다. 그저 아내의 공간에 자신이 환대받기를 바랐을 뿐이었는데. 내가 그걸 처음부터 무참히 박살 냈으니 서운함을 넘어 화가 날 법도 했다. 티는 안 냈지만 속으로 불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꼬맹이었을 적 이혼 서류를 쓰며 벼랑 끝까지 갔던 전력이 다. 수개월 간의 부부상담과 지난한 노력 끝에 관계는 회복됐지만 그때의 경험이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주체성이 강한 아내가 종종 '졸혼'이나 '독립' 같은 단어를 꺼낼 때마다 가슴도 철렁거렸을 테고. 더구나 이렇게 주방과 침실까지 갖춘 공간을 아내가 떡하니 얻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학생회실 소파에 누운 자신에게 조용히 담요를 덮어주던 다정한 여자친구는 어디 가고 대놓고 철벽을 치는 아내의 모습에 남편 역시 '그때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라며 탄식했을지도 모른다.


자유를 지키려던 나의 과민반응과 관계의 불안으로 인한 그의 과민반응. 이 둘은 다른 듯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닮아 있다. 나는 자유를 얻은 후라야 둘 사이에 수평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왔고, 그는 굳건한 관계의 토대 위에서 내가 자유를 누리길 바랐을 뿐. 중요한 건 우리 둘 다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고 이 관계가 유지되길 바란다는 것.


한 공간에 머물기 때문에 느슨해도 상관없던 우리 관계의 밀도는 거주의 분리로 인해 더욱 단단해질 필요가 있었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냐며 냉장고 문을 열어본 남편은 아마 이걸 보고 확신했을 것이다. 이건 작업실이 아니라 살림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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