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도심과는 조금 떨어진 동네 외곽의 작은 아파트 단지에 있다. 재작년까지 9년간 운영하다 문을 닫은 마을카페 인근이다. 큰 아이가 초등학생 때 이사 온 후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으니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이 동네 주민으로 살았다. 주변에 상가가 많지 않은 게 흠이지만 아파트 맞은편은 그린벨트로 묶인 밭이 보이고 뒤쪽은 산이라공기 하나만큼은 참 좋은 동네다. 나름 정을 붙이고 오래 산 터라 멀리 이사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지내왔는데 돌아오는 전세 만기를 앞두고 동네를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로 이사 온 이유였던 마을카페가 문을 닫았고, 옆동네에 작업실을 얻으면서 생활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동네를 옮길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이사 갈 집에 대한 조건들을 정리해보았다.
큰 딸이 서울로 통학 중임을 고려해 버스 노선과 가까울 것.
작업실과 지금보다 더 멀어지지 않는 거리일 것.(또는 더 가까울 것)
남편의 방을 만들 수 있는 아파트 구조일 것.
친척들이 모여 제사와 명절을 지내야 하니 기왕이면 거실이 넓은 집일 것
채광이 좋고 전망이 좋은 집
기왕이면 수리나 리모델링이 된 집
한 줄로 정리하면, 다음 우리 집은 '작업실과 가까운 위치에 11**버스가 다니고 볕이 쏟아지는 탁 트인 전망을 가진 방 네 개짜리에 거실이 넓은 리모델링된 아파트'였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경제적 조건으로 계약이 가능한 집이어야 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미션을 갖고 부동산 앱과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매물을 찾기 시작했다. 원하는 조건을 다 갖추진 못하더라도 최대한 비슷한 집을 찾아볼 참이었다.
우선 작업실 인근에는 방이 네 개인 아파트가 많지 않았다. 제일 처음 발견한 매물은 바로 옆에 위치한 다른 아파트 단지의 저층 매물이었다. 하지만 집주인이 올 블랙으로 리모델링을 한 탓에 분위기가 어두운 데다 2층이라 채광과 전망을 포기해야 했다. 더구나 우리가 가진 예산보다 1억이나 높은 가격이라 바로 탈락.
두 번째 매물은 작업실 인근에 지은 지 30년 된 대규모 아파트에 리모델링된 집었다. 우리가 감당하기엔 몇 천이나 오버되는 가격이었지만 인근에 대단지 아파트가 입주하면서 전세 물량이 늘어나 가격이 계속 하락하는 중이었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집을 보러 갔다.
3층이라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전망은 아니었지만 단지에 심은 나무가 보이는 초록뷰를 가진 집이었다. 리모델링된 집이라 구축 느낌도 나지 않았다. 작업실과도 가깝고 큰 아이 통학 거리는 오히려 단축되는 위치였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가격 조정이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중개인이 집주인과 이야기해 보겠다며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리모델링에 들어간 비용이 있어 내놓은 가격에서 조정은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래저래 돈이 문제였다. 집은 빨리 구해야겠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다 며칠 후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사모님, 지난번에 보신 00아파트 같은 평수에 저렴하게 나온 집 있는데 한 번 보시겠어요? 집수리를 중간에 한 번 하긴 했는데 오래전에 한 데다 탑층이라 주인이 싸게 내놨어요."
이미 가격 빼곤 다 마음에 들었던 아파트였던 터라 바로 약속을 잡고 부동산으로 달려갔다.
이 번에 볼 집은 17층 아파트의 17층.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꼭대기층이었다. 항상 중간층에만 살아봐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우리가 맞출 수 있는 금액이었기에 일단 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중개인이 먼저 문 앞에 와 있었다. 도어록은 슬라이드 형태의 커버를 밀어 올리는 구형이었는데 키패드가 잘 눌리지 않는지 중개인이 두세 번 시도한 후에야 문이 열렸다. 그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출입문도부드럽게 열리지 않았고 현관 타일색과 중문 디자인까지 오래전 아파트의 느낌을 풀풀 풍겼다.
중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가니 기다란 갈색 소파와 갈색 마루, 갈색 장식장, 월넛 몰딩까지. 집이 전체적으로 중후(하다 못해 올드)한 느낌이었다. 거실 한가운데 깔린 이불에다 한쪽에 놓인 자외선 치료기와 실내자전거며 집안이 전체적으로 어수선했다.
거실을 대충 훑어보고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벽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실에 있는 소파와 티브이, 장식장 등 온갖 물건을 그대로 비춰주는 대형 거울이 벽면에 설치되어 있었다. 거울 너머 보이는 짐 때문에 집이 몇 배는 더 어수선해 보였다. 목욕탕도 아닌데 이런 대형 전신 거울을 왜 벽에 설치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큰 거울을 왜 설치하셨을까요?"
"글쎄요. 집주인분이 일부러 돈을 들여서 설치하셨다는데 저도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주방을 살펴보니 얼룩진 싱크대 상부며 주인이 직접 붙인 듯한 시트지가 눈에 거슬렸다. 세탁실이 문도 없이 싱크대를 마주 보고 있는 구조도 이상했다. 주방 가스레인지는 한동안 요리를 하지 않았는지 기름때 범벅이어서 도저히 그대로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중개인은 계약이 성사되면 집주인이 가스레인지는 교체해 줄 거라고 했다.
안방은 매우 컸지만 온갖 짐으로 먼지가 가득하고 창고나 다름없어서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났다. 창문은 한옥집에서나 볼 법한 창호지를 바른 스타일이었는데 오랜 세월에 틀어졌는지 끝까지 닫히지도 않았다. 벽면을 뚫고 나온 알 수 없는 전선들이며 욕실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까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너무 지저분해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중개인은 집주인 부부가 따로 지내면서 아저씨가 이곳에 혼자 거주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청소가 그리 말끔하지 않으니 감안하고 보라는 의미였다.
안방과 주방, 욕실의 상태가 심각하다 보니 곳곳에 틈이 벌어진 마루와 부스러진 몰딩 모서리, 흠집이 심한 손잡이와 잘 닫히지 않는 방문, 완전히 망가진 인터폰, 떼지 않고 그대로 둔 30년 전 중앙 보일러식 온도조절기 따위는 큰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리모델링된 집과 비교하면 극과 극의 체험이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집은 다른 집에는 없는 압도적 장점이 두 가지 있었다. 주변 시세보다 월등히 낮은 가격과 탁 트인 전망이었다.
이 집은 나무 밖에 보이지 않던 3층과 달리 이 도시에 얼마 남지 않은 논과 수락산 끝자락이 어우러진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 베란다 블라인드가 없는 상태여서 여름에는 더위가 걱정될 만큼 채광도 좋았다. 이 집의 수많은 단점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꼭대기 층이긴 하지만 남향이라 볕이 잘 드니 겨울은 잘 날 수 있겠군'하는 생각을 했다. 작업실에서 도보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한 곳이니 남편의 불안감도 한결 가라앉을 것 같았다.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이렇게 전망 좋은 넓은 아파트에 살아볼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집 상태가 조금 걱정이었지만 나름 손보고 관리하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처음 집을 본 날, 나를 사로잡은 전망
남편과 시어머니까지 함께 집을 한 번 더 보고 난 후 계약을 결정했다. 시어머니는 집이 넓어 살림하기 힘들 텐데 괜찮겠냐며 걱정하셨지만 주방과 거실이 넓어 제사 지내기는 편하겠다고 말씀하셨고, 남편은 자기 방이 생긴다는 것과 작업실이 가깝다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 큰 아이는 통학거리가 짧아질 거라는 말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고, 둘째도 넓은 방을 쓰게 되어 만족하는 눈치였다.
계약을 마치고 나서 내가 한 일은 작업실을 구하기 전과 비슷했다. 작업실에 취향을 담았듯 집에도 가족들이 좋아할 만한 취향을 담아 보기로 했다. 가능하면 집에 있는 가구들을 그대로 활용하되 거실과 안방만큼은 새로운 분위기로 바꿔볼 생각이었다. 남편이 더 이상 작업실을 탐내도 되지 않을 만큼. 나도 가끔은 집에 들어오고 싶을 만큼. 꼭 그만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