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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Oct 08. 2023

박사 과정 첫 학기를 보내고 알게 된 사실

박사과정 학기가 끝났다. 과제에 쫓기듯 지낸 4개월. 평일은 물론이고 수업이 있는 월요일과 화요일을 앞둔 주말이 되면 꼼짝없이 과제에 붙들려 지냈다. 가끔 가족들과 영화도 보고 혼자 산에도 오르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켜켜이 쌓인 숙제가 앞을 가로막았다. 개학을 앞두고 며칠 만에 한 달치 일기를 쓰던 초등학교 시절의 여름방학이 매주 되풀이되는 느낌이었다. 학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지 않은 탓에 학점이 인정되지 않는 선수과목을 추가로 들어야 했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 과목이 거의 매주 숙제를 내주었다.


전공 관련 이론을 다루는 한 과목은 매주 논문들을 읽고 비평문을 제출해야 했는데, 매주 한 편씩 착착 써내질 못하면 학기말에 과제가 수북이 쌓이는 시스템이었다. 다른 숙제들을 먼저 하느라 한 편, 두 편 밀리던 것이 어느새 여덟 편까지 되었을 때. 나는 완전히 벼랑 끝에 몰린 느낌이었다. 과제를 피하느라 야금야금 쓰던 브런치 글도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거대하게 쌓인 과제의 산을 넘지 못한다면 대학원을 아예 때려치워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을  것도 이 즈음이었다. 과제를 미루고 글을 쓰는 것이 회피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박사과정에 진학한 것 자체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선택한 회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운 계절을 보냈다.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퀭한 눈으로 '공부가 안 맞는 건 아닌데, 숙제가 많아 힘들다'는 나의 하소연을 들은 어느 박사님은, 다 잘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러다 코피가 터지거나 쓰러지는 사람을 여럿 봤다고 했다. 어떤 교수님은 대학원생이 자기 연구에 집중하지 않고 수업을 듣거나 과제를 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일침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제를 하는 것 또한 연구 능력을 기르고 논문을 쓰기 위한 과정이기에 마냥 소홀히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학업과는 거리가 먼 대학 시절을 보냈으니(어쩌다 올 F를 맞았을까?) 뒤늦게 하는 공부마저 허투루 하고 싶진 않았다. 학자금 대출이라는 부채를 감당하면서 긴 시간을 들이는 일을 취미처럼 할 순 없지 않은가. 공부에 대한 어지러운 속마음을 '도망치는 글쓰기'로 털어놓은 후 마음을 단단히 먹었더랬다. 지적 호기심이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 든, 내가 선택한 공부로부터 도망치지 않겠다고.


마지막 2주간은 부득이한 업무상의 외출을 제외하고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지냈다. 자료를 찾아 검토하고, 출력하고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필요한 내용들을 정리해서 논리적으로 써 내려가는 일을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반복했다. 갈수록 눈이 침침해지고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돌덩이가 든 것처럼 무거워졌다. 평소 잘 먹지도 않는 사발면과 과자를 사 와서 밤늦은 시간에 먹거나 여러 종류의 사탕을 수시로 입 안에 까넣으며 스트레스를 달랬다.


드디어 6월 마지막 주 수요일. 저녁 8시 즈음 마지막 과제를 제출했다. 학교 홈페이지에 '제출하기'를 누르자마자 처져 있던 정신이 주체할 수 없는 해방감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라면을 끓여 먹고 새벽 4시까지 유튜브를 시청했다. 눈꺼풀이 내려앉는데도 '더 보다 잘 거야, 조금만 더...'를 부르짖으며 영상의 바다를 헤엄쳐 다녔다.


다음 날은 알람을 끄고 늦잠을 잤다.  둘째와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하고, 코인 노래방도 가고 만화카페에서 라볶이를 먹으며 판타지 만화를 읽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또다시 3시간짜리 드라마 압축 영상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도 점심 즈음에 일어나 웹툰을 보며 몇 시간을 달렸다. 그렇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틀을 보내고서야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기 시작했다.




우선 머리 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책도 쳐다보기 싫었다. 글쓰기는 더욱더 하기 싫었다. 빈 화면에 활자를 쓰는 것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였기에 노트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손목이 아프더라도 설거지를 하고 칼질을 하는 편이 나았다.


나는 한동안 신경 쓰지 못한 집 살림을 돌보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그동안 남편이 설거지와 빨래, 밥, 장보기 등 신경을 많이 썼지만 집은 이사 후 깔끔했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해진 상태였다.


거실 곳곳에 널린 너저분한 물건들을 치우고 청소기부터 돌렸다. 욕실 변기와 바닥, 거울에 진 얼룩을 닦아내고 주방에 마구잡이로 뒤섞인 그릇들도 다시 정리했다. 냉장고에 오래된 음식물은 버리고 새로 장을 보고 밑반찬을 만들었다. 학기 중에 숙식하던 작업실은 오전 출근, 저녁 퇴근으로 정하고 방학 동안에는 집에서 기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2학기가 되면 또 신경을 못쓰게 될 터. 추석부터 시아버님과 시할아버님의 제사를 준비하려면 가을이 오기 전, 틈틈이 살림을 정돈해 놓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몸 쓰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수개월간 붙잡고 씨름하던 자료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길 건 남기고, 버릴 건 버려야 또 다음 학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테니. 노트북 폴더에 담긴 자료와 과제물, 출력해 놓고 미처 보지 못한 문헌들,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가며 읽은 자료들을 살펴보며 남길 것과 버릴 것을 분류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한 학기 동안 과제를 몇 개나 한 거지?


과목마다 만들어놓은 과제 폴더에 들어가 15주간 제출한 과제를 세어 보았다. 모두 32개였다. 선수과목으로 과제에서 열외 된 전공 한 과목을 빼면 3과목이니 과목당 대략 10개의 과제를 한 셈이다. 과제의 3분의 1은 전공인 도시사회학의 공간이론에 대한 12개의 논문 크리틱과 기말 페이퍼였고, 3분의 1은 행정학 관련 논문과 저서의 발제 및 토론주제 작성 11편, 중간과제였던 소논문과 기말과제인 연구계획서였으며, 나머지 1/3은 도시공학과의 로컬크리에이터와 도시재생 과목에서 우리나라의 로컬크리에이터 현황 파악을 위한 엑셀과 PPT, 사례 도서 리뷰, 기말 페이퍼 등이었다.


과제들을 위해 검토한 논문은 총 125편. 그중에 출력하여 세밀히 분석하며 읽은 논문은 해외 논문을 포함하여 모두 42편이다. 완독 한 책은 4권, 필요한 챕터만 읽은 책은 8권, 검색해서 읽은 후 과제에 인용한 언론기사는 99건, 자료 수집을 위해 들락거린 홈페이지는 15곳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보니 대략의 공부량이 가늠이 된다. 공부에 들인 시간은 어떠한가. 공휴일로 인한 휴강과 한 번씩의 결석을 빼면 3시간짜리 수업을 4과목씩 14번 들었으니 168시간 정도 된다. 수업을 듣기 위해 학교를 오간 84시간을 더하면 모두 252시간. 하지만 과제를 하는데 들어간 시간은 도저히 계산이 불가능하다.


양이 아닌 질적인 면에서는 어땠을까.

나는 무엇을 더 알게 되었을까?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이론을 발견하고, 희미하던 것들이 명료해지고, 새로운 것을 실행할 지혜를 얻었을까. 세상에 내가 모르는 것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 외에 내가 알게 된 것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에 막혀 글을 완성하지 못한 채 여름을 났다.


과제 중에는 참고해야 할 자료가 많아서 평소 쓰는 개인책상대신 미팅용 긴 테이블을 이용한다.
첫 학기에 검토한 문헌과 저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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