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반 동안 당근 마켓(이하 '당근')에 빠져 살았다. 아침마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당근 모양 아이콘을 눌렀다. 하루 종일 당근에서 물건들을 구경하고 늦은 밤에도 당근을 한 번 살펴본 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낮이고 밤이고 매일 휴대폰에 얼굴을 들이밀고 손가락으로 물건을 훑어보는 일이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당근 앱을 깔고 열흘쯤 지나자 폰에 알림이 왔다. 일주일간 매일 방문한 덕분에 단골 배지를 획득했단다. 기분이 좋다기보단 약간 무서웠다. 중독 같았다.
인터넷 검색창에 '쇼핑중독'을 입력해보았다. 쇼핑중독의 증상 중 한 가지가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구입한 물건을 가족들에게 숨기기 시작한다.
당시 나는 당근을 시작한 지 열흘만에 가방을 다섯 개나 구입한 상태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예뻐 보이면 채팅창에 '구매 가능할까요?'를 날렸다. 민트색 크로스백과 민트색 숄더백을 산 후에야 비슷한 색깔의 가방을 두 개나 샀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제 그만 사야 겠다는 생각보다는 다른 색 가방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린 짙은 파란색 숄더백 하나를 구입했다. 때가 타는 흰색 물건은 절대 사지 않는다는 평소의 소비 철학을 깨고 흰색 숄더백도 하나 구매했다. 코로나 때문에 결국 취소될 행사였는데 괜히 드레스코드를 빨강으로 맞추자고 해서 빨간색 숄더백까지 사고 나니 숄더백만 네 개가 되고 말았다.
모두 한 번씩만 메고 외출을 해봤고, 이 중 가장 먼저 산 민트색 숄더백은 들고나가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이즈가 큰 숄더백들은 작은 체구인 내게는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시원찮은 손목으로는 들고 다니기 힘들 만큼 무거웠다. 넓은 수납공간에 비해 넣어 다닐 물건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코로나 때문에 가방을 메고 외출할 일도 많지 않은 때. 당장 맬 일이 없는 숄더백을 하나 둘 옷장 속에 넣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이 가방들을 굳이 보지 않았으면 했다.
이때 든 생각은 '가방을 그만 사자'가 아니라 '이제 작은 가방을 사자'였다. 그리고 작고 가벼운 크로스백 4개를 더 집으로 들였다(중독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이번엔 파랑, 빨강 대신 무난한 회색과 갈색으로. 새로운 가방을 집에 들여놓을 때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거 괜찮지? 아무 때나 부담 없이 메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응, 괜찮네."
거실 한 구석의 행거에 작은 크로스백을 눈에 보이게 걸어두려면 이런 과정이 필요했다. 그것 봐. 다들 괜찮은 제품이라고들 하잖아?
그렇게 당근에서 사버린 가방만 총 8개.
작은 사이즈라 부담 없이 나름 잘 쓰고는 있다. 사놓고 보니 숄더백과 크로스백을 합쳐 8개의 가방 중 4개가 같은 브랜드의 가방이다.
가방을 너무 많이 샀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나는 "이제 가방은 끝!"을 외치며 다른 물건으로 관심을 옮겨갔다.
이번엔 신발이었다. 한 번도 신어본 적 없는 나** 운동화 한 켤레와 정장에도 어울릴 법한 백화점 브랜드의 운동화도 한 켤레 샀다. 역시 사본 적 없는 앵클부츠도 한 켤레 구입하고. 그런데 사놓고 보니 평소처럼 다 검은색이었다. 너무 칙칙하다 싶어 흰색 운동화도 한 켤레 추가했다.
당근에서 구입한 검은색 신발 네 켤레와 흰색 신발 한 켤레. 하지만 원래 습관대로 한 켤레만 매일 신고 다닌다.
그다음엔 시계에 꽂혀서 손목시계를 3개나 사버리고 말았다(미쳤구나! 미쳤어! 중독이란 게 원래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거지만). 흰색, 검은색, 갈색. 모두 사용감은 있지만 질이 좋은 제품들이었다.
당근 마켓을 통한 소비에는 훌륭한 명분이 존재했다. 바로 자원절약과 가성비! 거기다 이웃과의 거래라는 감성적 접근까지. 무엇보다 매력적인 건 사치나 과소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건 중고니까.
이미 당근 마켓에서 임시보호 중인 길고양이 물품을 꽤나 거래하고 무료로도 받았던 둘째 아이는 속속 도착하는 택배 물건들을 보고 한 마디 했다.
"당근 마켓에서 또 뭐 샀어?"
"아... 이거.... 원래는 엄청 비싼 건데.. "
"엄마는 계속 원래는 엄청 비싼 건데, 하면서 사더라."
보통 직거래로 물건을 사고파는 당근 마켓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택배거래가 활성화되었다. 게다가 차도 없고 팔도 불편하니 주로 택배로 거래한다.
그래. 평소 내 형편엔 살 수도 없고 받아본 적도 없는 물건들이니까.
44년간 누려보지 못한 자본주의 물질의 상징인 백화점 물건을 중고로라도 가져보려는 이 몸부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예전엔 이런 물건 없어도 잘만 살았는데. 곰곰이 돌이켜보다 세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결핍, 불안, 보상심리.
지난해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코로나로 디자인 프리랜서로서의 수입도 확연히 줄었고, 주민들과 운영 중이던 마을카페에서의 모임도 모두 중단되었다. 가을엔 오른팔의 골절상으로 대학원 연구계획서를 포기했고, 브런치에 글마저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한 해가 끝나가려던 참에 당근 마켓을 만났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팔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나 자신을 위한 물건들을 사고 싶었다. 이왕이면 나에게 없는 것, 사보지 못한 것, 갖고 싶었던 것들로. 하지만 백화점에서 10만 원이 넘어가는 물건이라고는 아이들에게 맛있는 고기나 실컷 구워 먹여 보자며 남편과 큰 맘먹고 산 무쇠 프라이팬이 전부였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한때 비쌌던)중고 물건을 당근에서 실컷 사보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창작하고 낳는 행위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글 한 편을 쓰는데 며칠이 걸리기도 하고, 그림 한 점을 그리는데 한 달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연구계획서나 논문을 쓰려면 최소 수개월 이상이 필요하고, 책 한 권은 몇 년이 소요되기도 한다.
하지만 물건은 다르다. 적당한 값만 치르면 누군가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을 손쉽게 가질 수 있다. 이런 문명의 이기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산속에 혼자 사는 자연인도 공장에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텃밭에서 농작물을 일구어 먹는 사람도 마트에서 파는 휴지를 사다 쓰지 않는가.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간다.
나 역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낼 재주는 없다. 옷을 만들지도, 농사를 짓지도, 집을 짓지도 못한다. 하지만 삶 전체를 소비자로만 살아갈 마음이 없던 탓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창작자로서의 삶을 지향해왔다. 타인과의 관계망을 통해 경험과 지혜를 나누며 의미 있는 삶을 꾸리고 싶었다. 그렇게나마 누군가에게 즐거움이든 정보든 주는 사람이라야 내 삶의 가치를 긍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엔 그 모든 길이 막힌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에게 음식도 만들어주지 못할 정도로 손목이 아프고, 사람들을 만날 수 없고, 팔이 부러지고, 글도 쓰지 못하면서 삶이 퇴보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다른 이들은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혼자 뒷걸음질 치는 막막한 기분. 악몽을 꾸는 것만큼이나 불쾌하고 불안했다.
팔을 다친 후 브런치에 들어오는 대신 당근 마켓으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하루에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다른 작가들의 새로운 글들을 마주하며 울적해지는 게 싫었다. 같은 해에 대학원에 입학한 동기는 이미 논문을 쓰느라 인터뷰를 하고 다니는데 나는 손목 아프다고 한 학기 미루고, 팔 부러져서 한 학기 미룬 탓에 1년이나 늦었다는 생각을 하기 싫어서 전공서적도 펼쳐보지 않았다. 그 대신 끝없는 물건의 풍요 속에 나 자신을 밀어 넣었다. 그러면 잊을 수 있었다. 아니 도망칠 수 있었다. 삶이 뒤로 물러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예민한 감수성의 더듬이를 버리고 물질적 욕망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면 나도 다른 이들처럼 무언가를 가져야 했다. 글과 논문, 관계를 살 수는 없으니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만들어진 물건을 사는 일이었다. 외롭고 허전한 마음은 홈쇼핑이 알아준다고 했던가. 나의 결핍감을 당근이 달래준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1년 동안은 티셔츠 한 장도 사 입지 않겠다던 소박한 결심은 그렇게 와르르 무너졌다.
새로 산 물건들이 내가 만들어내지 못한 나의 가치들을 메워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브랜드에 그렇게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창작으로 나의 가치를 성장시킬 수는 없겠지만, 물건들의 브랜드가 그걸 좀 뗌빵해주리라는 헛된 기대였달까.
글은 못 썼지만 나도 나** 운동화쯤은 신을 수 있잖아!
논문은 날아갔지만 앞으로 10년은 맬 수 있는 예쁜 가방들을 많이 건졌다고.
돈은 못 벌었어도 7천 원짜리 지갑 하나는 사도 되는 거 아냐?
이런 마음으로 하나, 둘 사들인 물건의 수가 자그마치 48개나 되었다. 겨우 한 달 새.
매일 술을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당근 마켓에 접속하면서 얻은 게 물건만은 아니었다. 판매자들이 팔길 바라는 그 물건을 내가 살 수 있다는 권능감, 그리고 그들이 주는 감사의 메시지가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다.
그 물건 팔고 싶은가요? 제가 사죠, 그 물건!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몇 천 원에 불과한 돈이라도 지불하고 나면 내가 꽤나 능력 있고 쓸모 있는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건을 판 이들도 고맙다고 하니 큰 도움이라도 준양 자존감이 높아졌다(이 문장을 쓰고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그게 문제였다. 자존감! 당근 중독의 이면에는 '자존감'이라는 예민한 문제가 존재했다.
처음엔 몰랐다. 자꾸만 물건을 사는 행동이 낮아진 자존감 때문이라는 걸. 해냈어야 할 일들, 성취했어야 할 결과물에 대한 허전함을 채우느라 당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평소 나는 소유한 물건이 나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과도한 소비에 대해 늘 경계했다. 먹고 싶은 건 먹자는 주의였지만, 신발은 하나가 떨어질 때까지 신고 가방은 백팩과 크로스백 하나면 충분했다. 지금도 나는 물건이 가치를 증명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몸은 반대로 움직였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인지 부조화'라고 말한다. 신념(인지)과 행동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 것이다. 둘 사이의 부조화를 감소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지금 당장 부조화를 일으키는 행동을 멈추면 된다. 하지만 나는 소비를 멈추는 대신 자기 정당화를 선택했다.
이 물건은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필요할 거야.
원래의 값보다 저렴하게 구입하는 거니까 경제적으로도 이득이잖아.
물건이 버려지거나 새 물건을 사는 것보단 자원 절약에 일조한다고 볼 수 있지.
물건을 사는 건 판매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게 분명해.
이렇게 인지 부조화를 감소시키기 위해 선택하는 행동, 즉 자기 정당화에는 목적이 있다. <인간, 사회적 동물>의 저자 엘리엇 애런슨(Eliot Aronson)은 말한다. 자기 정당화의 목적은 '자기 방어'라고.
당근에서의 중독적인 소비 행위는 '생산적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평가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행위였던 셈이다.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유지해야만 자신을 여전히 현명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쇼핑중독의 원인이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위 자체의 쾌감을 추구하는 데 있다는 것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해내지 못한 일들에 대한 결핍감과 불안이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이에 대한 보상심리와 방어기제로 과도한 소비를 불러일으킨 거라면. 이 중독의 고리를 끊을 답은 글쓰기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돈을 들이지 않고 생산적인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2020년의 마지막 날. 한 해의 마무리를 당근과 함께 하고 싶지는 않았다. 브런치에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쓰지 않았다. 대신 등산 재킷을 하나 구입했다.
2021년의 첫날. 글쓰기로 새해를 맞이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손은 브런치 대신 당근으로 향했다. 그리고 패딩 점퍼를 구매했다. 중독이란 이런 것이다.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기이한 현상.
1월 3일. 나는 당근에서 산 등산 재킷과 패딩을 입고 혼자 뒷산에 올랐다.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자기가 보낸 3일을 들여다보면 앞으로 3주를 어찌 살게 될지 알 수 있고, 3주를 보면 3개월을 어떻게 보낼지 예측할 수 있다고 했다. 3개월을 보면 향후 3년을 알 수 있고. 그러니 3일을 함부로 보내선 안된다. 새해를 맞아 보낸 3일이 이 모양이라면 나는 앞으로 3주도, 3개월도 비슷한 모습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다음 날 당근에서의 거래를 결산해보았다. 거래한 사람들의 숫자와 구입한 물건의 개수와 금액까지 모두 확인해보니 그제야 자기 정당화에 '빠직'하고 금 가는 소리가 들렸다. 벌어들인 수입은 절대적으로 적은데 짧은 시간 동안 쌀자루에 구멍 난 듯 돈이 줄줄줄 당근 거래로 빠져나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마음의 공허를 달래는데 글쓰기만 한 것이 없다는 건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건만. 팔을 다친 후엔 그 글쓰기가 참 멀게 느껴졌다. 2주 전, 74일 만에 브런치에 글을 올린 건 이런 지난한 중독과의 싸움에서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물론 중독 증세가 그리 쉬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거래수는 줄었지만, 그 후로도 매일같이 당근에 접속했고 그 후로도 8건의 거래를 더 진행했으니까. 대부분은 건강 증진을 위해 시작한 등산용 트레킹화와 등산화, 등산 재킷, 등산 장갑과 같은 물품이었지만 그게 없다고 산을 오르지 못하는 건 아니다.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당근으로 향한 손길은 막을 수가 없다. 사람이 어떤 일에 배움과 통찰을 얻으려면 이 정도는 몰입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자기 정당화가 하나 더 늘기도 했다. 이게 단순히 자기 정당화에 그치지 않으려면 증명이 필요하기에 다시 2주 만에 글을 쓴다. 글 쓰는 주기가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당근에 접속하는 시간과 거래 건수는 자연히 줄거라 생각한다. 더 깊은 경험과 통찰을 위해 한동안 판매자로 살아볼 수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