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덜결에, 적당히 한 1년 써먹다가 계약기간 만료카드를 꺼내며 구겨진 휴지조각처럼 자연스레 내치려던 계획이 틀어진 것도 모자라, 제돈으로 월급을 줘가며 초보생산직근로자인 나를 무기계약직으로 채용할 상황에 처한 것이 속이 상했는지 모르겠다. 그러거나말거나, 나에게는 그야말로 인생 후반의 새로운 서막이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열악한 작업환경에 대한 불만족감따위는 뒷전인 채로 다만, 안정된 취업을 하게 된 것만이 내심 다행스러웠다. 사장또한 그 뒤집어지는 속내야 어떻든 겉으로는 오래 잘 일해보자는 뉘앙스로 말을 했으니 일단은 믿어보는 수밖에. 적어도 사장은 이제 멋대로 나를 해고할수는 없는 입장이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기간의 정함이 없는, 무기게약직이 된 뒤로도 1년여 동안은 사장의 나에 대한 태도는 비교적 에의바른 수준을 유지했다. 그녀에게 나는 여전히 자랑스러운 고급인력이었음에 틀림없어보였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도 사장은 자신의 위치를 늘 잊지 않고 할말 못할 말은 아무생각없이 아무때나 순식간에 가래침뱉듯 내뱉고는 했다. 나는 그러거나말거나 '사장님'으로서 대우해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나의 계약직위에 변동이생기고 얼마후 시점부터, 우리나라에도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한 세계적인 전염병의 여파로 경제침체가 심각해져갔다. 물론 그 훨씬 전부터, 내가 처음 입사하던 즈음부터도 아프리카돼지열병이라는 돼지 전염병때문에 이미, 사장님의 사업은 힘들어지고 있는 상태였기는 했다. 그런저런 경제상황의 변화에 따라 침체에서벗어날 희망이 아득해보이는 상황에서 사장의 속이 편할리는 없겠다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직원들은 모두 대체로 늘 숨죽인 듯, 있는듯 없는듯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어서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기대하며 출퇴근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한 배를 탄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심리가 아니었겠는가. 그럼에도 사장은 제 기분에 따라 어느날 갑자기 한번씩 예민하고 날카롭게 굴었다.
한달에 매출이 300만원밖에 안된다며, 그래갖고 당신들 월급을 어떻게 주겠느냐며....도대체 푸념인지 화풀인지, 그래서어쩌란말인지....주어진 일에나 열심히 하는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돌멩이 던지듯 쏟아내곤 했다.
그런 어느 날인가, 사장이 모두를 코딱지만한 사무실 원탁 앞으로 불러모아 이렇게 말했다.
-아는 다이어트식품공장이 저쪽에 있는데, 거기는 일이 많은데 사람이 없대요. 우리는 할일이 없으니까 오늘은 거기 가서 일좀 도와주세요.
그 식품공장 사장과 아는 사이인데 어려울때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말로는 미안한데 그렇게 해줄수있겠느냐며 양해를 구하는 듯한 제스처를 써가며 지시했다.
그날, 포장생산직인 나와 제품생산직인 젊은 여자애 그리고 사무실의 경리직원까지 세명이 차출되었다. 우습게도 경리는 제 본연의 업무만 하기도 바쁜데 (생산직인 우리 둘이나 가라한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도매금으로 딸려가서 온종일 다이어트식품을 용기에 담고 박스에 포장하는일을 함께 했었다. 얼마나 코미디같은 상황인지!
그날의 일은 더도덜도 아니고 딱 그 수준이었다. 그 다이어트 식품공장은 뜻밖에도 바빠서 생산인력이 필요한데 일하는 사람이 고정적인 아르바이트생 한명 뿐이었고 그 공장 사장의 딸이라는 과장이라는 직함의 젊은여자애가 하얀 위생복을 입고 왔다갔다하며 함께 일을 했고, 나와 함께 간 두 명이 그들과 함께 일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더팩토리_D는 실제로 그즈음 거의모든 매출이 줄고 중단되어 하루종일 출근해서 손가락이나 빨고있을수만 없으니 청소를 하거나 쓸데없는 포장지를 접는 일만 하며 하루하루 8시간을 채우는 중이었기에 차라리 이렇게라도 종일 내 노동력을 의미있게 사용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첫날 그곳으로 가며 우리는 궁금했다.
-그럼, 거기 가서 일하는 하루 일당을 줄까?
모두 궁금해서 얼굴을 쳐다보며 답을 찾아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일당은 따로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이미 더팩토리_D의 직원이니 사장의 지시에 따라 장소를 바꿔 일하게 된 것 뿐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날 우리가 받은 것은 일인당 5000원씩 주는 중식비가 전부였다.
6000원도 아니고 5000원이라니? 처음엔 황당했다.
누굴 거지새끼로 아나? 더팩토리_D에서 사먹는 식당밥도 6000원이었는데 5000원으로 어디 가서 뭘 사먹으란 말인가 할 때, 그 공장의 과장이 알려주었다.
자기들이 먹는 식당이 저어기 있는데, 거기가 5000원이니까 거기로 가라고.
가봤다. 공장에 갈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개인 차를 끌고 기름 써가며.
뷔페식이던가....대충 갖다먹는데, 기가막혔다. 어쩜 딱, 5000원짜리만큼의 밥과 반찬류에 감탄이 터져나와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좀더 먹다간 토가 나올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토나올 것 같은, 행주냄새가 나는 듯한 점심을 먹고 나서도 열나게 일한 뒤 우리는 덤앤더머처럼, 그래도 보람찬 하루를 보낸 것만 같아서 바보처럼 평안한 마음으로 퇴근을 했다.
다음날도 그곳에 가게 되었는데, 우리 경리는 밀린 일이 너무 많아 빠지고 나 포함 생산직 두명만 그곳에서 하루 더 일을 해주었다. 달랑 점심값 5000원씩을 받고.
하루종일 일이 없어서 사장 눈치나 보며 더팩토리_D의 공장에 웅크리고 있는 거보다는 차라리 생산적인 이틀이었다고 자평하기는 했으나,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그리고 또 다른 생산직 여자애는 더팩토리_D에서 일하자고 들어온 사람인데 이렇게 사장이 지시하면 깩소리 못하고 어디든 가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그러고 보니 이외에도 어느 물류창고에도 가서 하루인가 반나절인가 손소독제 박스포장을 도와주고 온 적이 있었다. 그 역시 사장의 요청으로.
사장이 원격조종하듯, 이리가라면 이리가고, 저리가라면 찍소리한번 없이 저리가서 그들의 손발이 되어주는 그러한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음에도 나는 그야말로 소모품처럼 일을 열심히 하는 데만 정신을 팔았을 뿐이었다.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내가 거부해도 사장은 나를 해고할 권리가 없는 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