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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리자, 열리겠지?

_무모한 시작

by somehow Apr 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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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내가 이토록 무모한 자者인 줄을 몰랐었다.



어릴때부터 나는 매우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자신감따위는 거의 없는, 조용히 숨만 쉬는 존재였다.

그러한 성향은, 물론 일방적인 나의 판단이기는 하지만, 태생의 근원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탯줄을 통해 나의 골조와 핏줄에 아로새겨졌다고 느껴왔다.


나이들어 가는 동안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기는 참 어려우면서도 은연중에 스스로 감지되기 시작한 나의 미숙한 성향은 한걸음 한걸음 내디뎌야 하는 순간마다 결정장애와도 같은 머뭇거림과 우유부단함으로 발현되며 스스로를 곤혹스럽게 했다...

학교공부도 대인관계도 연애관계도 심지어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마당에서조차도 나는 늘 불안하고 망설이는 심정으로 벽을 만날 때마다 돌아서고 회피하며 머뭇거렸음에 틀림없다.

간신히, 여태까지 살아온 것도 참 다행이라 할 만하다. 그나마 스물아홉 살무렵에라도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쩌면 여전히 룸펜으로서 홀로 골방에 처박혀 쓸쓸한 외톨박이로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있을 지도 모르겠다.


나의 무모함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은 대학졸업 후에도 제대로 변변히 해내지 못했던 월급생활자가 되기로 결심한, 2018년12월부터일 것이다. 그로써 나는 내 핏줄에 아로새겨진 장애와 약점들로부터 스스로 탈피하기로 결심했다. 


그로부터 나는 시야가리개[차안대遮眼帶]를 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차안대(遮眼帶): 경마에서, 말의 눈 부위에 씌우는 기구. 말이 측면이나 후면을 볼 수 없도록 말머리에 씌우는 것으로, 주변의 상황에 잘 놀라는 말이 앞만 보고 달릴 수 있게 시계를 좁히도록 고안되었다. 양쪽 눈 뒷부분에 컵 모양의 가죽 또는 고무재질을 부착해 경주마의 좌우 시야를 차단,  뒤나 옆에서 다른 말이 따라 붙더라도 보이지 않아 불안감 없이 앞만 보고 달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주위가 산만한 말이나 주변 물체의 움직임에 쉽게 흥분하는 말들이 주로 착용한다. 말이 나타내는 공포심이나 불안감 정도에 따라 부착하는 컵의 크기를 조절한다.


조심스레 구인광고를 뒤적이던 어느 순간부터, 그때까지의 나의 볼품없는 이력과 경력은 월급생활자가 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그냥 물러나 다시 답답한 안방으로 들어가 더욱 감감히 숨만 쉬는 것으로 남은 생을 점철시킬 것인가, 아니면 뭐라도, 그야말로 뭐라도 해봐야 할 것인가의 최후의 선택지만 남아있었다. 나는 더이상 안락하고 막막한 안방에서 숨만 쉬는 짓거리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최종학력조차 위조해가며 이력서를 날리기 시작했다.


그역시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난생처음 시도해 보는 생산직 근로자로서의 삶 또한 개나소나 손만 내밀면 주어지는게 아니었다.

그곳에도 나름대로 일꾼을 뽑는 규칙과 절차가 있기때문이었다.

초보 생산직근로자 도전이력서라고 우습게 볼게 아니었다.


생산직은 그야말로 몸을 써서 무언가 생산해내는 일을 해야하므로 기본 체력과 경력을 중시했다.

맨처음 얼덜결에 이틀을 채우지도 못하고 쫓겨난 어떤 식품공장에서도 나의 생산직 무경력과 사회생활경력 자체가 거의 기재되지 않은 허름한 이력서를 의심했다. 도대체 그나이 먹도록 뭐하고 살았냐는 듯, 왜 그 나이에야 생산직을 시작하려는 거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급한 김에 마지못해 채용하고는 이틀째 오전 반나절동안 감시하며 부려먹더니만, 일을 너무 못한다며 집에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그때, 그날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들여다본 탕류 음식을 생산포장하는 식품생산공장의 민낯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나는 죄책감을 느끼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얘기는 [브런치북_가장 열렬한 하루]에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y600days


무모하게 대문 박차고 나서 '나, 이제 생산직 근로자로서 월급생활자가 되겠다'며 뛰어든 현실은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출근 이틀째에 집으로 쫓겨났으나 절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무조건, 다시 어디든 나를 받아주는 곳을 찾아야 했다.

몇시간동안 벼룩시장인지 교차로인지 그런 구인공고지를 정독한 끝에 다시 한 곳을 찾아내었다. 곧바로 면접을 보러 달려갔고 다음날부터인가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무려 5주를 버티어냈다. 2018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에 시작하여 2019년 1월을 채우고 2월 들어서며 그만둔 것 같다.

[가장 열렬한 하루]에도 기록했지만, 그곳은 지금까지도 최악의 일터라고 기억한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고 절망스러웠으나 딱 한가지, 월급이 아닌 주급으로 일에 대한 보상이 주어짐으로써 일주일 이주일..5주를 버틸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아무 경력없는 나를 이유없이 받아주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때문에 하루이틀만에는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었다. 최소한, 적어도 한달은 버티어내야 그후 다른 생산직에서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시험하고 점검하는 기간으로 삼아야 했다.




생산직에 뛰어든지 4년차인 올해, 벌써 4월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실업급여수급 180여일의 기간은 거의 막바지를 향해간다.

나는 실업급여 수급 시작 시점부터 실업급여 종료후의 취업을 준비하기로 했다.


우선의 취업목표는

지난해 과정을 모두 마치고 취득한 사회복지사2급자격에 걸맞는, 사회복지사였다.


1월중순 어느날, 조심스레 워크넷에 접속하여 키워드 [사회복지사]로 구인공고를 검색했다.

오마이갓!

이렇게나 많은 사회복지시설에서 사회복지사를, 아니 나를 기다리는구나!

사회복지사자격도 갖추었겠다, ITQ과정에서 엑셀프로그램운용법도 배우고 있겠다, 가방끈도 적당하겠다...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심히 빈칸을 채우고 다듬어 공들인 '사회복지사 지원 이력서'를 송부했다.

 

다음날 이력서 열람상태를 확인했을 때, 분명히 담당자는 그것을 열람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열람, 하고 끝.

다시 또 오마이갓...

왜 연락이 안 오는지 처음에는 바보처럼 궁금했다. 나중에라도 연락이 오겠지? 오려나... 그리고... 의기소침해졌다. 정말로 너무 무모한 것은 아닐까,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까...그로부터 다시 2월말까지 나는 때를 기다리는 잠룡처럼 ITQ수업과정을 종료하고 자격시험을 치르고, 요양보호사자격시험에 몰두했다.


그렇게 계획했던 일들을 어느정도 '할만큼 했다'싶어지자 다시 취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실업급여수급은 5월까지지만, 그때가 지난 뒤에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싶은 근심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즈음 요양보호사과정을 수료한 교육원의 밴드에 'A주간보호센터에서 근무할 요양보호사'를 찾는 구인공고가 올라왔다.

사회복지사 취업이 어렵다면 차선책으로는 요양보호사역할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나는 일단 무모하게, A주간보호센터의 연락처로 문자를 남겼다, 아직 요양보호사 자격증 없는데 면접 볼 수 있겠느냐고.(당시 요양보호사자격은 시험만 응시한 상태였고 합격자발표는 3월이며 자격증은 4월에 나오게 되어있었다.)


내가 무모하다고 하는 이유는, 당시에는 요양보호사자격시험만 치른 상태이므로 채용이 될 수도 없고, 된다 해도 무자격상태여서 일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뭐든 찔러봐야 했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으니, 과연 내 급조된 사회복지커리어가 사회복지 분야에서 먹힐지 아닌지 꼭 알아보고 싶었다.

또 어차피 나선 걸음이니 내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차안대를 걸친 경주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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