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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크모리 Sep 24. 2021

[절뚝거리는걸음7]그냥 난 나대로 행복할래

아플 권리, 날씬하지 않아도 될 자유, 그냥 이대로 행복할 권리

추석명절, 우리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왔다.

다 같이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는데 아빠가 뜬금없이 내 체중을 어림짐작하며 구박했고, 난 따졌다.


아빠, 나 잠 잘 자고 행복해. 아빠가 나 약 못 먹게 해서 정신과 가서 의사한테 혼났던 거 기억 안 나? 저대로 딸 약 못 먹게 하면 딸 앞세워 보내는 거밖에 안 된다, 딸 먼저 보내고 싶냐, 환자분은 이거 먹고 싶어서 먹는 줄 아냐고 막 화냈잖아. 내가 그때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는데.


라고 우다다 따졌더니 아빤 또 '그 얘길 왜 해'라고 얼버무렸다. 그리고 집에 와선 아빠에게 더 따지지 못한 분함과 자꾸 왜 나에게 틀렸다고 하는지 답답해서 한숨만 푹푹 쉬다 결국 대성통곡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잠을 잘 자려고 하고 밥을 맛있게 먹으려고 했고 어느 정도 그렇게 되어서 너무너무 기쁘고 행복한데 자꾸 틀렸다고 말한다. 


하루 한 끼 먹던 애가 삼시세끼 먹으니 살이 찌는 게 당연한 거고 입맛도 없고 먹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던 애가 밥을 맛있게 먹으니 살이 찌는 거고, 약 없인 단 일초도 잠들지 못했던 애가 잠 잘 자보겠다고 거의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잠을 잘 자니 살찌는 게 당연한 건데.


2017년 초,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나날 중에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여보 여기 사람들은 야근을 이렇게 많이 하는데 왜 한 명도 안 아파? 뭐 다 산삼 먹나 봐, 왜 나만 아프지? 


몸이 아파 결근한 날이면 집에서 전전긍긍, 좌불안석이었다. 특히 책 마감 때면 더더욱. 노트북 앞에 앉아 과장님과 카톡으로 내 원고 수정할 부분을 전달받으면 바로 수정해서 넘겼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자리 비워서 죄송하단 말과 함께.

2016년에 다니던 직장에선 내가 일하다 쓰러져서 응급실 실려갔다 와도 아무도 괜찮냐 묻지 않았다. 아프단 말에 “그게 아픈 거냐, 난 하루 종일 토해도 일했고 새벽 두 시까지도 일했다”라는 말을 고작 두 살 많았던 그 당시 스물여덟 살밖에 안 된 대리에게 들었다.


아픈 건 늘 죄였다. 대학 룸메이트는 내가 아픈 애란 이유만으로 방을 바꿔달라 했었고, 더 어려서는 매일 체해서 심한 두통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나에게 같은 반 여자애는 쟤는 뭐 맨날 아파, 아픈 척하냐란 비아냥도 들었다. 꾀병이냐 묻는 남자 동창애의 말은 애교 수준이었다. 


전 직장에선 몸이 아파 결근했다 일요일에 출근한 나에게 실장이란 자가 회사를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너는 꼭 부디 객지에서 과로로 돌연사하길 바라고 또 바란다.


어제도 생리통 때문에 자궁이 쥐어짜이는 극심한 생리통을 겪으면서도 진경제와 진통제를 같이 먹으면서 제안서를 썼다. 이 정도면 생리휴가 쓸 수 있는 거 아닌지, 아니 그전에 이 회사에 생리휴가라는 게 있는지 생각하고 또 고민했다.

아프면 쉬라는 말이 코로나 이후 계속 나오고 있지만 도대체 “어느 정도” 아파야 쉼을 요구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정도면 다 참고 일하겠지, 이 정도면 아픈 게 아니지. 


아픈 걸 숨기면서 살아야 하는 이 사회가 너무너무 좆같아서 싫다 정말로.


며칠 전엔 과장님이 "회사에 계단 있어서 불편하지 않아요? 다리도 불편한데"라고 아무렇지 않게 물었고, 난 당황해서 나 다리 아픈 거 어떻게 알았냐 묻지도 못하고 괜찮아요,라고 둘러댔다. 그러고 퇴근해선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난 내가 다리 저는 게 부끄럽지 않고 창피하지도 않은데 막상 이렇게 누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 비밀을 들킨 것 같더라.


대학교 때는 나에겐 너무 머나먼, 하지만 고작 학교 앞이었던 택지를 나갈 땐 자주 택시를 타야 했다. 그땐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게 다리를 절었다. 말랐어서 체력이 약해서 그랬는지. 그때마다 잘 모르는 아이들이 공주네, 부자네 라고 한 마디씩 얹었다.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내가 걸을 때 내 다리가 얼마나 아픈지 수치화 혹은 색깔로 표시돼서 남들이 볼 수 있었으면- 하고. 진짜 정말 많이 생각했다. 지금도 거의 매일 생각한다.


걷는 것이 너무 고돼서 걷기를 싫어하는 날 보면 열에 아홉은 말한다. 그래도 걸으라고. 시간 날 때 한 바퀴씩 걸으라고. 이 말은 소아마비 2급 장애가 있어 휠체어 타고 다니던 전 회사 사장님도 했다. 그 말을 듣다 듣다 도대체 내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삼성의료원 재활의학과 교수님께 가서 물어봤더니 되도록 걷지 않되 걷게 되면 천천히 똑바로 걷는 습관을 들이라 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 큰 병에게 굴복당하느라, 이겨내느라, 어르고 달래 같이 사느라 누구보다 강하다는 건 안다. 아프지만 누구보다 강하다. 대학원 시절, 엄마와 통화하다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엄마 엄마는 열일곱 살 때 뇌출혈되고 희귀병인 거 안 적 있어? 엄마 인생이 아무리 힘들었다고 해도 내 인생에 비하면 쨉도 안 돼.


그 말을 하면서 엄마와 나는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숨죽여 울었다. 울어?, 응 울어라는 말만 주고받으면서.

나는 늘 아팠고 지금도 아프지만 이제는 정말 자책하지 않는다.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파? 아픈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아픈데 어쩌라고.

나는 나대로 건강한 삶을 영위하면서 행복하겠다.

날씬하지 않아도 될 자유, 아파도 되는 권리를 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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