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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per Mar 10. 2024

싱가포르 이주민의 삶 |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에서 자란 50대 아저씨 이야기

아름다운 차이나타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1970년에 태어나서 싱가포르 차이나타운에 살았던 한 사람과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0대 중반의 아저씨와 차이나타운을 걷게 되었습니다.


싱가포르가 자유무역항이 된 이후,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왔어요. 그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남중국인들입니다. 현재 싱가포르 국민들의 75%가 중국에서 온 정착민들입니다. 아저씨의 증조할아버지도 그중에 한 분이셨대요. 싱가포르에 가서 돈을 벌어서 중국에 큰돈을 가지고 돌아오는 계획을 품고 아저씨의 증조할아버지는 배에 오릅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좋은 좌석을 얻지 못했고, 배의 지하에서 몇 달을 살아야 했대요. 오랜 기간 풍랑을 헤쳐, 마침내 싱가포르에 도착합니다. Fuk Tak Chi Museum에 가면 당시 싱가포르의 모습을 모형으로 만나볼 수 있어요.

 



티안혹켕 사원 (Thian Hock Keng Temple)


증조할아버지와 함께 싱가포르에 도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었어요. 안타깝게도 중국을 떠난 모든 사람이 싱가포르에 도착하지는 못했습니다. 긴 항해 길에 풍랑을 만나거나, 질병을 얻는 일이 많았거든요.


이 기도를 올렸던 곳이 티안혹켕 사원입니다. 이 사원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 사원이에요. 바다의 신 마주(Mazu)를 모시는 사원이고 남중국 전통 양식으로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꿈을 안고 남중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주할 결심을 하고, 배를 타고 오랜 기간 풍랑을 헤쳐, 마침내 싱가포르에 도착한 당시 증조할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저씨의 할아버지가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변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대요. 당시는 청나라 시대였고, 변발을 하는 것이 규율이었거든요. 아래 동상이 그때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이 사람들은 이미 싱가포르에 왔고, 이제 규율을 어기는 것도 아닌데 왜 계속 이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하지만, 아저씨의 증조할아버지는 중국으로 돌아갈 돈이 없어서 남아야만 했어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마침내 받아들였을 때, 긴 머리를 잘라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때 그는 머리카락만 잃은 것이 아니었어요. 중국에 돌아갈 희망을 잃은 것이었어요.


이후, 증조할아버지는 샵하우스에 살았대요. 샵하우스는 가게를 뜻하는 shop과 주거공간을 뜻하는 house의 합성어로, 1층에는 상점이, 2층에는 주거 공간이 위치하는 구조예요. 현대의 주상복합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이 당시에 중국 이주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집들을 샌드위치처럼 다닥다닥 붙여서 만들어요. 그래서 양 옆에 있어야 할 창문이 없습니다.  위 사진을 보면 창문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옆 면을 보여드릴게요.



이 집은 길이가 82m에요. 그래도 이 집은 골목에 있는 집이라 측면에 창문이 있는데, 집과 집 사이에 끼어있는 샵하우스들은 양 옆이 벽으로 막혀있어요.


샵하우스는 너비는 좁고 길이가 긴 구조가 특징입니다. 당시 영국인들이 너비에 따라서 세금을 매겼거든요.


아저씨도 태어나서부터 샵하우스에서 살았대요. 부모님, 두 명의 형, 아저씨 그리고 여동생 이렇게 여섯 명이 함께 살았다고 해요. 아저씨의 아버지는 길거리 노점상에서 음식을 파셨는데, 아주 가난했대요. 그래서 아버지는 한 층이 아니라, 약 6평 (20㎡) 정도의 공간만 렌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집주인들은 임대료를 최대한 많이 받기 위해 한 층을 8개에서 10개의 큐비클로 나눕니다. 즉, 한 층에서 4-50명의 사람들이 함께 살았어요. 방이 아니라 '큐비클'이에요. 왜냐하면 벽이 없었거든요. 가뜩이나 창문이 적은 집인데 추가로 벽을 만들 수가 없었어요. 에어컨도 없던 시대에 1년 내내 열대 기후인 싱가포르에서 한 층에 4-50명이 모여 생활하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큐비클마다 공기라도 통해야 했기 때문에, 위가 뚫려있는 파티션으로 구역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저씨는 프라이버시라는 것을 모르고 자라셨대요. 밤이 되면 작은 큐비클 안에 얇은 매트리스를 펼쳐서 여섯 가족이 붙어서 잤대요. 큐비클 밖에는 주방과 화장실로 가는 복도가 있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해요. 아침이 되고, 매트리스를 돌돌 말아서 한편에 두면 20 제곱미터는 거실이 되고, 다이닝룸이 되고, 스터디룸이 되었습니다.


집에는 주방이 하나뿐이었어요. 주방 하나를 8-10 가족이 나누어 써야 했기 때문에, 엄마는 지정된 시간에만 요리를 할 수 있었어요. 엄마는 빨리 요리를 하고, 그 공간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빨래를 하곤 했대요.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엄마는 거기서 어린아이들 샤워를 시켰다고 해요. 아저씨는 항상 바닥이 축축한 주방이 싫었대요.


왼쪽에 연두색 집이 보이시나요? 집이 꺾이는 부분을 보면 제일 위층에 어두운 색으로 창이 칠해진 곳이 보이는데, 그곳이 주방 자리였대요.



주방 옆 쪽으로 시선을 옮겨서 왼쪽 끝에 작은 창문이 있는 공간이 화장실이었대요. 당연히 화장실도 4-50명과 나누어 써야 했어요. 재래식 화장실이었고, 플러시는 언제나 작동하지 않았다고 해요.


12살이 되던 해에, 아저씨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계속 샵하우스에서 살아야 하나?‘


‘내 여동생. 얘는 곧 사춘기가 될 텐데, 계속 오빠들이랑 바닥에서 자는 게 맞는 건가?'


그래서 엄마한테 물어봤어요.


"엄마, 더 넓은 곳으로 이사 가면 안 돼? 아니면, 적어도 창문이 있는 곳으로 이사 가면 안 돼?"


엄마의 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엄마는 yes라고도 하지 않았고, no라고도 하지도 않았어요. 엄마는 회피했어요. 엄마는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면서 계속 요리를 했대요.


엄마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거든요. 엄마도, 본인의 미래가 답답했을 거예요. 엄마가 거짓말이라도 하기를 원했던 아저씨는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가 이웃집으로 갔대요. 근데 이웃집 화장실을 확인한 순간, 아저씨는 엄마에게 바로 되돌아갔어요.


"엄마 미안해. 그 질문 다시는 안 할게."


적어도 아저씨네 집에는 화장실이 있었거든요. 아저씨는 이웃집 주방에서 화장실을 봤어요. 양동이였어요. 양동이 근처에는 파티션이 있었지만, 양동이가 다 찰 때까지 비울 수가 없었대요.



이 시대에는 양동이를 처리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위 사진에 있는 나선 계단이 그 사람들이 사용하던 계단이래요. 삽하우스 뒤편에는 계단이 꼭 있는데, 전부 화장실이랑 이어져 있어요. 상점이 있는 앞면을 통해서 양동이를 수거할 수 없어서 뒷골목 계단을 통해 양동이를 모았고, 강가에 가서 배설물을 버리고 돌려줬다고 합니다.


1970년. 차이나타운은 싱가포르의 가장 큰 슬럼이었어요.



안시앙 로드 (Ann Siang Road)


샵하우스에 가난한 사람들만 사는 건 아니었어요. 부자들도 샵하우스에 살았어요. 아저씨 집 근처에 안시앙 로드라고 불리는 부촌이 있었고, 형이랑 구경하러 가곤 했었대요. 타일을 보면 부자 동네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아저씨와 형은 문에 뚫린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대요. 80여 미터의 길이의 넓은 공간에서 단 한 가족이 사는 것, 바닥이 아니라 침대에서 자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고 해요.


아래 샵하우스는 지금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쓰고 있는데, 어렸을 때 발코니가 있는 집을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대요.



그렇지만, 아저씨는 정말로 엄마한테 다시 그 질문을 하지 않았어요. 그게 아저씨의 삶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답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대요.


15살이 되던 해,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형이랑 같이 큐비클에 앉아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대요. 아버지는 아주 조용한 사람이었고, 거의 말을 하지 않으셨는데 그날은 달랐대요. 아주 신난 표정으로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얘들아, 가자. 우리 이사 간다."


아저씨는 아빠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하던 일을 하면서 말했어요.


"거짓말. 아빠는 아직도 노점상에서 일하잖아요."


"진짜야. 우리 어디로 이사 갈 건지 보여줄게."


아빠가 보여준 곳은 어디였을까요?



335B. 이것이 아빠가 보여준 것이었대요. 차이나타운에 있는 공공주택이에요.


1985년, 정부는 슬럼을 없애고 싶었고, 동시에 샵하우스를 보존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보조금을 주고 공공주택으로 이주하는 것을 도와줬대요. 당시 돈으로 2,000달러 (약 200만 원)만 내면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돈도 없었대요. 정부 대출금까지 받아서 돈을 어렵게 마련해서, 아저씨네는 마침내 샵하우스를 떠날 수 있었어요.


방 두 개, 거실 하나, 화장실 하나와 주방이 딸려있는 18평짜리 집이었어요. 집에 들어갔을 때 아저씨가 처음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화장실을 쓰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창문을 여는 것이었을까요?


뛰어가서 벽을 느끼는 것이었대요. 15년간 아저씨는 벽이 없는 곳에서 살았거든요. 그래서 벽을 가진 게 너무 소중했대요. 안전하다는 느낌, 보호받는다는 느낌, 프라이버시를 존중받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끼고, 너무나도 행복했대요.




싱가포르에 사는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차이나타운 골목을 수도 없이 걸었어요. 첫 번째로 살던 집이 걸어서 10분 거리 안에 있었거든요. 아저씨와 걷고 난 후에 차이나타운은 저에게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습니다. 엄마 이야기를 하실 때 눈물을 글썽이던 눈, 떨리는 목소리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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