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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현 Oct 08. 2022

전쟁의 시청자들에게

에필로그 / 전쟁의 시청자들 #11

'아 내 인생 네 번째 전쟁이구나.' 1985년생인 저는 이번 전쟁을 이런 생각으로 맞이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 번째로 '시청하는' 전쟁이겠죠. 먼저 세 번의 전쟁이란, 1991년 걸프전,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입니다. 물론 1985년 이래 전쟁이 세 차례만 일어났을 리 없습니다. 2022년 7월을 기준으로 해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쟁 건수가 59건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국방연구원)가 있는 걸요.


하지만 도 모르게, 그냥 그렇게 줄 세워 버렸습니다.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유혈의 난투와 총격이 늘 벌어지는 현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건만, '전쟁'이라는 단어에는 왠지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다지 염두에 두고 싶지도 않았던 거겠죠.


그런 내 안의 '편향성'을 깨닫긴 했지만, 뭔가 특별한 반성이 뒤따랐던 것도 아닙니다. 문제라고도 생각지 않았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내 주위에는 아예 전쟁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봤어? 전쟁 났던데?' '그러니까 말이야. 2022년에 무슨 전쟁이...'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렇게 스치듯 지나가는 짧은 대화 속에서만 존재했습니다.


다만 저는 그들보다 좀 더 교활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그럴듯한 '글쓰기'의 소재로 사용하자 마음먹었던 거죠. 적당한 입바른 소리로 전쟁의 폭력을 비판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그래서 반전의 가치를 결론으로 제시하는 전형적인 교훈론적 서사 말입니다. 게다가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에서도 활동한 이력이 있으니 평화주의자를 자처한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최초의' 의도였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기사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다 보기도 벅찰 정도로 끝없이 쏟아지는 전쟁보도들을 보며 뭔가 거대한 세계사적 역사의 현장을 관통하는 듯한 뿌듯함마저 느꼈습니다. 특히 서방의 선전 보도들을 읽고 있자면 평화의 '잔다르크'가 된 것만 같은 고양감이 일어났죠.


속으로는 이런 주문을 강박적으로 외웠습니다. '전쟁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니까. Peace!'


사진 출처: 픽사 베이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2022년  6월 27일 저녁이었습니다. 배달시켜놓은 치킨을 기다리며, 소파에 누워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죠. 마침 뉴스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27일 현지시각으로 오후 3시 50분경, 우크라이나 크레멘추크시에 있는 한 쇼핑몰이 폭격당해 최소 19명이 사망했고 실종자를 포함하면 피해자 수는 50여 명에 달할 것이라는 소식이었죠.



내용만 보면 '여느 때와 같은' 참사 보도 정도로 취급될 (그리고 내가 수집하는 기사 목록에 추가될) 뉴스거리였겠지만 뒤따르는 영상이 적잖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창공을 찢어버리듯 관통하는 시커먼 물체(미사일)와 그것이 내리 꽂히며 발생한 소음과 충격, 화염이 영상에 온전히 포착되어 있었던 거죠.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 사진 같은 것들은 그동안에도 자주 봐왔지만 날아드는 미사일의 '폭격 직전' 모습을 봤던 적은 없었습니다. 마치 지옥불, 매테오(Meteor)를 연상시키듯 검게 타오르고 있던 그야말로 '살상 무기'. 순간 소름이 돋으며 이 비극이 '마치 내게 일어날 것만 같은' 상상 나래가 펼쳐졌습니다. 네, 공포였죠.


저는 얼른 채널을 돌려버렸습니다. 바뀐 채널에서는 독일 엘마우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관련 보도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과 러시아 제재 등을 주요 주제로 한 이 회의는, 공교롭게도, 앞서 크레멘추크시의 폭격이 있기 바로 전날인 2022년 6월 26일에 개최됐던 것이었죠. 이 뉴스에도 역시 참고 영상이 있었습니다. 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G7 정상들은 회의를 취재하러 임석한 기자들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죠.


"(회의할 때) 재킷 벗을까요? 푸틴보다 우리가 더 터프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존슨 영국 총리)

"웃통 벗고 승마 정도는 해야죠"(트뤼도 캐나다 총리)

"바로 그거죠. 우리도 가슴 근육을 보여줘야 해요"(존슨 영국 총리)


"G7 정상들 웃통 벗고 푸틴 조롱". 요컨대 G7 정상들은 늘상 상의를 탈의하고 남성성을 과시하는 푸틴을 조롱하기 위해 저런 제스처를 취했던 겁니다. 사진 속 그들은 모두 웃통을 벗고 환하게 웃고 있었죠.


뭔가 알 수 없는 허탈감,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역겨움에 가까운 불편함이 느껴졌습니다. 실 두 사건은 특별한 연관이 없습니다. 시기 정도만 가깝죠. 따라서 G7 정상들이 '위선적'이라 욕할 거리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정치적 메시지를 전했을 뿐, 이 폭격을 왜곡하거나 은폐할 의도의 '착한 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저는 그런 감정들을 느꼈던 걸까요.


이 불편함은 앞서 크레멘추크 시 폭격 영상을 시청하지 못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그 폭격 영상을 보지 못했다면 나도 저들과 같이 그냥 웃고 말았겠죠. 요컨대 제가 느낀 감정들은 순항미사일이 내리 꽂히는 우크라이나의 현실과 유머가 가득한 정상회의 공간 둘 사이에서 기인하는 위화감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경험이 '어쩔 수 없는 전쟁의 시청자'로서의 제 위치를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영상에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솔직하고 대담하게 말합니다. 자신의 '가슴 근육'을 보여주겠다, 그것을 믿으라고 말이죠. 저는 그 '가슴 근육'의 정체를 알고 싶어 졌습니다.


사진 출처: 픽사 베이

시청자들을 허탈과 무관심으로 이끄는 일종의 진정제. 강철과도 같은 위선의 갑옷.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처럼 시선을 강탈하며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도록 만드는 프로파간다. '가슴 근육'이라는 것이 진정 그런 것이라면 '다시 보기'를 시도해야만 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봐야 했습니다. 사안 하나하나를 '백과사전'처럼 따질 능력은 없습니다만, 보리스 존슨의 '가슴 근육'에 혼이 뺏기는 굴욕만은 피해야 했습니다.


"일상의 어느 부분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거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독재자들의 지배를 받는다." -에드워드 버네이스,『프로파간다』, 99p-


이 글은 거기에 대한 작은 반항입니다. 뭐 그래 봤자 '시청자 후기'에 불과하지만요. 실제로 이 글은 매스컴이 제공하는 영상과 보도, 그들이 추천하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어쩌면 일부는 상당히 선동적이겠죠. 끝내 연출자들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지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결론이 뭔데?"


이게 제 결론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 저와 같은 '전쟁의 시청자'가 있으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얼른 채널을 돌리시라 권해드립니다. 어쨌든 안 보고 안 들으면 그만이니까요. 그렇게 '일시적으로라도' 시청자의 위치를 벗어날 순 있을 겁니다. 대신 끝까지 잘 도망쳐 다녀야 하죠. 정말 '잘' 도망 다니셔야 할 겁니다. 전쟁을 완전히 떠나보낸 세상에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 사이의 평화 상태는 자연 상태는 아니다. 자연 상태는 오히려 전쟁 상태이다." -칸트, 『영구 평화론』, 34쪽


전쟁이 거듭될수록 시청자들의 존재는 점점 더 선명해질 것입니다. 시청자들은 늘 전쟁에 매혹되고, 전쟁은 늘 시청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겠죠. 언젠가 우리의 차례가 올지도 모르죠. 전쟁이 우리의 이름을 호명한다면 우리는 모든 특권을 빼앗긴 채 방청석에서 쫓겨나갈 겁니다. 브라운관은 더 이상 당신을 보호해주지 못할 겁니다. 누군가 자신의 집 대문을 부수고 들어와 총구를 겨누는, 빨간 딱지가 붙은 징집 영장이 날아오는, 공기를 찢는 포탄의 충격에 놀라 일어나는, 박살난 티브이가 거실에 널부러져 있는. #pray for




'전쟁의 시청자들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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