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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현 Oct 04. 2022

『허탈』원래 전쟁이라는 게 그래

전쟁의 시청자들 #10

위선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위선이 할퀴고 간 자리에 남는 것은 분노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배신당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이러한 분노를 표출할 수조차 없는, 말하자면 위선을 알고서도 묵인해야만 하는 상황 그 자체입니다. 피아가 첨예하게 갈리는, 전쟁이라는 이름의 '위선 직판장'에서는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이기는 편'이어야만 하는 '우리 편'에 총구를 들이댈 순 없기 때문이죠. 시청자들은 대세의 한가운데서 '이단자'로 낙인찍힌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참아야죠. 조금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시청자들은 끝까지 참아내야 합니다. 늘 그랬듯 바로 옆에서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뜬 '도덕적 전사'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서 바로, "그것이 전쟁이란 거야"하는 식의 사고로 방어를 하고, "그 이상은 말하면 안 돼"하며 몸을 사렸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양한 이유를 붙인다. "잠자는 아이를 깨우지 마라, 국익에 손해를 끼친다, 배상을 청구하면 어떻게 하나". 전후 세대도 이와 같은 감정적인 과잉방어를 계승하며 살아온 게 아닐까." -노다 마사아키(서혜영 옮김), 『전쟁과 인간』(2000), 176쪽-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이렇게 올라오는 분노와 불편함 들을 참아내다 보면 언젠가는- 웬만한 위선도 참아낼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생겨난다는 점입니다. 기실 심리상담 분야에서 잘 쓰이는 개념이죠.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그와는 좀 다릅니다. 이 근육은 상처를 극복하고 미래를 향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그런 탄력적인 근육이 아니며, 상처 위에 상처를 입히는 방식으로만 단련될 수 있습니다. 끝없는 자극과 고통으로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무에타이 선수들의 정강이 근육처럼 말이죠.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시청자들의 '마음의 근육'은 끊임없이 단련되고 있습니다. 위선의 자극이 많을수록 근육은 더 훌륭하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근육들을 철갑처럼 두르고, 모든 감정의 초월한 '초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이 초인은 제일 먼저 이런 말을 내뱉는다고 합니다.


"원래 전쟁이라는 게 그래." 


이 글의 도입부에서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무리 슬픈 전쟁보도를 봐도 예전과 같이 절절한 '고통의 공감'에 이를 수 없는 한계적 상태에 봉착해버렸다고요. 왜 그렇게 돼버렸을까. 이제 저는 그에 대한 약간의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초인이 되는 과정(?)이었나 봅니다.




이 글을 쓰는 몇 개월 사이 러시아의 기세는 초기에 비해 크게 침체됐습니다. 이젠 우크라이나의 반격이 성공했다는 반가운 소식들이 더 빈번하게 들려옵니다. 언론의 보도 방향은 러시아의 폭력에서 러시아의 패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러시아의 모습을 현장감 있게 다룰수록 기사의 조회수는 늘어나니까요. 예컨대 러시아 국내에 부분 동원령이 선포(9월)되면서부터는 분노에 찬 러시아 국민들의 모습과 시위대,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듯한 광장의 분위기가 활발히 조명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당장 내일이라도 패망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 전쟁보도들의 향연을 즐기고 있자면요.



여, 시청자들은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무덤덤한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하죠. '다윗'의 돌팔매질이 마침내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되고 있다고요. 이제 우리의 역할은 필요 없다고요. 전쟁 말고 다른 곳에 좀 신경을 쏟아야겠다고요. 하지만 잘 생각해볼 일입니다. 역할? 시청자들이 과연 뭘 했죠? 'pray for Ukraine'? 아, 고통의 공감과 지지! 우크라이나를 향한 응원! 푸틴을 향한 비판!... 좋습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이 물음에 먼저 답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게 무뎌졌습니까?'


"스스로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 자가, 어떻게 타인의 감정에 대해 충분한 상상력과 공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그의 감정은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질서를 갖게 된다. 명예나 수치와 관련된 감정은 비대해지는 반면, 자신이나 타인의 슬픔과 기쁨의 감정에는 냉담해진다...예외적으로 자신이 비호하는 대상에 대해서만 연민의 감정을 부분적으로 남기게 된다. 그것을 통해 경직된 감정에 숨결을 불어넣으려 하지만, 그가 지닌 연민이나 애정은 일방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다 마사아키(서혜영 옮김), 『전쟁과 인간』(2000), 233쪽-


물론 처음에는 열심히 티브이를 시청했습니다. 쌍방의 전력비교표(a.k.a 조견표)를 레스토랑 메뉴표마냥 집어 들고 교양 있는 목소리로 주문을 한 뒤(다윗과 골리앗) 호스트들(언론)이 실어 나르는 각종 애피타이저와 메인 디쉬(전쟁보도)를 즐겼죠. 다 먹은 후에는 그럴 듯 한 후기(그럴듯한 논평)도 남겼습니다. '오, 신이시여. 오, 전쟁의 고통이여. 오, 불쌍한 사람들이여.' 


지만 지금은 이미 배가 부르다고 느낍니다. 한때 격렬한 감정 속에 타전되던 전투 관련 보도들 또한 어느 순간부터는 착 가라앉아 건조한 사실관계만 알리고 있죠.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자들의 고통에 주목하던 정치권, 시민사회의 관심도 순식간에 잦아들었습니다. 요즘 보도들을 보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교착 상태'라죠?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교착 상태'는 여기, 우리 시청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선? 우리 내 인생살이가 다 위선적인걸 어쩌겠냐고요.' '강한 놈이 살아남는다고, 뭐 적당히 국익 챙기겠다는데 그걸 또 어떻게 뭐라 하냐고요.' '전쟁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 '아 왜 나한테만 계속 그래? 우리가 전쟁 났어?' 


이쯤 됐으면 채널을 돌려야죠. 이제 레스토랑을 나갈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레스토랑 문을 나서면서는 이렇게 인사하겠죠. '다음에 또 올게요.'


"시청자분들, 우리는 왜 이렇게 됐을까요?"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시청자 혹은 시청자들이란, 필자인 저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낸 가상 집단입니다. 여러분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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