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5-B 코스
숙소를 옮기는 날이라 짐(배낭 한 개)을 모두 정리하고 아침에 퇴실했다.
오늘은 15코스를 걷고 내일 아침 배를 타고 추자도에 가서 1박을 하는 일정이다. 그런데 배낭이 무거워서 15코스를 매고 걸을 수도 없고, 입실하는 숙소까지 가서 두고 다시 걸으러 가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래서 '가방을 부탁해'라는 짐 옮김이 서비스를 며칠 전에 예약해 뒀다. 퇴실 숙소에서 입실 숙소까지 옮겨다 주는 서비스였는데 비용이 만원이었다. 물론 내 배낭은 가장 작은 크기여서 그랬고 최소 만원에서 짐이 크면 가격은 올라간다.
퇴실 숙소 안내자에게 가방을 맡기고 사진을 찍어 업로드하면 끝. 나는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나왔다. 당초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저지리가 관광지가 아닌 한적한 곳이라 교통이 불편했다. 할 수 없이 택시를 불렀고 제주는 택시가 잘 잡히는 편이었다.
택시 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올레길은 혼자 걸을 때가 가장 좋은데 사람이 별로 없고 숲이 우거진 곳은 무서워서 안 가게 된다고 했더니 기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사람이 없는 곳이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라고. 자연과 대면하라고. 그러면서 서울 같은 도시는 사람이 빽빽하게 있지만 사고는 더 많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을 혼동하며 살고 있다고. 나는 깊이 공감했다.
한림항에서 내려 스탬프를 찍고 걷기 시작했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비로 대기는 무척 쌀쌀했지만 맑고 깨끗했다. 하늘과 바다의 색깔이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올레 15-B코스는 한림항에서 시작해서 귀덕리를 거쳐 곽지해수욕장과 애월 바다를 지나 고내포구까지 가는 13킬로미터의 바닷길이다.
걷기 시작했는데 바람은 우우 소리를 내며 강하게 불었고 커다란 상어 떼가 몰려오듯 하얀 거품을 몰고 파도가 정말 철썩철썩 방파제를 치며 몰려오고 몰려갔다. 심지어 방파제를 넘어와서 걸어가다 물벼락을 맞기도 했다. 바닷가 방파제가 사람들이 빠지지 말라고 세워놓은 줄 알았는데 파도가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목적도 크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바다의 짙푸름은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보는 사람을 홀리는 그 짙푸른 바다와 하늘.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나도 제주 온 이래 가장 많은 사진을 찍은 날이었다.
얼마쯤 걸어가다 바다를 벗어나 마을 농로길로 접어들었다. 밭 옆에서 두 남자분이 담배를 피우다가 혼자 걸어오는 나를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했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수원에서 왔다고 하니 여기도 수원인데 했다. 나는 옆에 있는 다른 남자분이 수원사람이라는 줄 알고 "아 예"하며 인사를 하고 지나왔다. 근데 알고 보니 그 지역의 이름도 수원리였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가 재밌어서 혼자 웃었다.
수원농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15코스 A, B 갈림길이 나왔다. 나는 바닷길인 B길로 향했다. 재작년에 A길을 걸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켄싱턴 리조트를 지나 다시 바다가 나왔다. 여전히 바다는 푸르고 파도치는 소리가 시원했다. 이 파도소리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뭔가를 깨끗이 씻겨 나가게 하는 것 같은 시원함과 경쾌함이 있었다. 들을수록 계속 듣고 싶어지는 소리였다.
걷다 보니 파도가 많이 치는 날인데 바다에 테왁(해녀의 생명줄)과 테우(제주의 전통 뗏목)가 떠있었다. 제주 한수풀 해녀학교 인근이었는데 파도가 심해서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나보다 바다를 더 잘 아는 분들이니까 하며 걱정을 접었다.
기존의 콘크리트와 시멘트를 제거하고 제주 전통포구의 원형을 복원하여 간직하고 있는 귀덕포구를 지났다. 다리가 없었다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을 것 같은 새로 놓은 다리를 건너 금성천 옆에 있는 중간 스탬프를 찍었다. 올레패스 종이책과 모바일 올레패스 두 가지를 가지고 있어 두 개를 다 찍었다. 둘 다 찍는 손맛이 좋다.
곽지해수용장 인근에 오니 바다의 색이 하얀 모래사장으로 인해 더 연하고 다채로워졌다. 이곳에서는 관광객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파도로 인해 해안가를 걷는 것이 운동경기처럼 돼버렸다. 파도가 밀려갈 때를 기다렸다 후다닥 뛰어갔다. 그래도 뒤를 밀고 오는 파도가 있어 물을 맞기도 했다.
애월 카페거리 근처에 오자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보기 위해 나와 있었다. 애월 카페와 식당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주차할 곳을 찾는 차들로 길이 복잡했다. 수도권을 떠난 지 십오일, 오랜만에 보는 복잡함이라 낯설었다.
애월항에 와서 점심을 먹었다. 걸어가다 식당 이름과 메뉴가 마음에 들어서 들어간 '또똣 부뚜막'. 순두부찌개를 시켰는데 반찬도 깔끔하고 맛있었다. 엄마가 요리를 하고 딸이 서빙을 했는데 몸이 조금 불편하신 아버님이 손수 물을 가져다주셨다. 딸이 누군가와 주고받는 말을 들으니 아버님이 아프시다가 지금은 지팡이 없이도 걸으실 만큼 많이 좋아지셨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는데도 손님이 한두 명씩 들어왔다. 작은 가게에서 본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순두부찌개만큼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밥을 먹고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운동장에 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학교 같은데 건물에는 표시가 없어 지도를 찾아보니 애월초등학교와 애월중학교였다. 마을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이곳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어릴 때처럼. 얼마쯤 걸으니 종점인 고내포구가 나왔다. 올레 안내소 앞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오늘도 잘 걸었다 생각하며.
숙소가 있는 제주항 근처까지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한참을 가야 해서 안심하고 잠이 들었다. 잠깐 잤는데 누군가 깨워서 일어나 보니 버스 종점이었다. 놀라서 내렸다. 다행히 숙소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추자도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제주항에 아침 일곱 시까지는 가야 해서 제주항 근처 게스트하우스를 숙소로 정했다. 숙소는 탐라광장과 동문시장 근처였는데 도시재생사업으로 잘 정비된 젊음의 거리였다. 방 한 칸에 공동 화장실 겸 샤워장을 사용하는 곳이다. 공항과 가깝고 저렴하고 빈티지해서 젊은 아이들이 많이 이용하고 평도 좋은 곳이었다. 아이들의 세계에 들어온 이방인 같은 느낌이 잠깐 들었지만 이런 낯섦이 괜찮았다.
게스트 하우스가 오래된 건물이라 방음이 되지 않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숙소 바깥에서는 버스킹 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불러주는 노래처럼 들린다. 안대와 귀마개가 준비되어 있는 이유를 알았다. 버스킹 소리를 들으며 잠들다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새로운 도전들로 가득한 제주에서의 하루하루가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