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단순한 삶 06화

미니멀리스트

처음으로 아들이 불같이 화를 냈다.

by 정안

나는 미니멀의 세계에 입문한 지 1년이 조금 넘어가는 초보이다.


물건으로 꽉 찬 집에서 전쟁 같은 정리를 한 후 식구들의 원망과 의심의 눈초리에 상처도 받지만 그 많은 물건들을 내 집에서 떠나보낸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손님이 온다고 해도 청소를 위해 허겁지겁하지 않을 정도로 집은 나에게 휴식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방에 들어가서 방주인은 원하지도 않는 정리를 조금씩 하다가 쓰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는 안경 종이박스를 버리려고 보니 좀 고급져서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쓰려고 뚜껑과 안에 있던 가죽 케이스는 버리고 통만 보관했다.


외출에서 돌아온 아들이 나에게 물었다.

"엄마, 내 안경 케이스 어디 갔어?"

"버렸는데"

"뭐라곳!!! 엄마 그 안경케이스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데 그걸 버렸다고!!!"

"생전 안 쓰길래 버리려다가 박스가 괜찮아서 엄마가 쓰려고..."


화를 잘 내지 않는 둘째 아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보고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허둥지둥 찾아서 테이프로 붙여서 줬다. 아들은 진짜로 화가 났다.


"나는 정말 기분 나쁜 게 엄마가 내 물건을 쓰레기 취급한다는 거야! 엄마는 누가 엄마 물건을 쓰레기 취급하면 좋겠어. 정말 화가 나. 엄마 제발 이러지 마!"


나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각서까지 쓰는 심정으로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아들은 꾹꾹 참는 얼굴로 재발방지를 약속받고 나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진땀이 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내 심정이 저 심정이야..."

눈을 흘기며 넘겼지만 미안했다. 자신의 물건을 쓰레기 취급한다면 나라도 무척 기분 나쁠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아들방에 들어가면 눈을 반쯤 감고 내 볼일만 보고 나온다.

때때로 심각한 상태면 "아들 방 좀 치우지" 하면 바로는 아니어도 그날 안에 치운다. 치우는 게 내가 보기에는 시원치 않아도 여하튼 치우니까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가족 개인의 물건은 허락 없이 절대 버리지 않는다.


정리는 나를 철들게 한다.



우리 집에는 장식장 세 개가 입주할 때부터 있었다. 거실에 텔레비전을 올려놓는 용도로 두 개, 문구용품을 넣는 용도로 안방에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같이 근무하는 직원이 거실 텔레비전을 벽에 매달고 장식장을 치웠더니 청소하기가 훨씬 편해졌다고 했다.


집에 가서 장식장에 있는 물건을 붙박이 수납장과 책장 아래쪽에 정리를 했더니 세 개의 장식장이 텅 비었다. 게다가 장식장이 오래돼서 겉은 멀쩡한데 속은 오랜 세월 들어있던 물건들의 무게로 서랍 바닥이 무너져 있었다.


전에 같으면 당장 폐기물 딱지를 사서 나 혼자 끙끙대고 버렸겠지만 가족들과 의논하려고 모두 모이는 주말까지 기다렸다.


반성의 분위기를 물씬 주기 위해 둘째 아들에게는 사전 브리핑을 했다.

아들은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래 이렇게 미리 설명하고 알려줘야 하는 거였어! 주말에 정리할 일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주말에 가족이 모두 모였을 때 나는 조심스레 장식장에 있던 물건을 붙박이 장에 정리하니 다 비었다고 버리자고 했다. 예상대로 남편과 큰아들은 펄쩍 뛰었다. 아직 쓸만해서 앞으로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왜 버리냐는 거였다.


남편은 쓸모를 입증하듯 고장 난 부분을 깔끔하게 고치기까지 하며 버리지 말라고 했다. 나는 청소의 불편함과 넣어둘 물건이 없는데 뭐하러 가지고 있느냐고 했다.


팽팽하던 양측은 수차례 협상 끝에 장식장 하나만 버리고 두 개는 재배치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장식장 뒤에 얽혀있던 수많은 전선들 중 잘 안 쓰는 전선을 빼고 지나치게 큰 멀티탭을 정리하니 전선수가 반으로 줄었다. 모두 텔레비전 뒤에 숨기고 장식장을 벽에 바싹 붙이니 청소하기가 훨씬 편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가 반찬이나 김치가 줄어들면 작은 새 그릇으로 옮겨 담는 것이다. 반찬은 먹을 때마다 접시에 덜어 먹어서 오래 두고 먹어도 위생에 큰 문제가 없었고 작은 그릇으로 옮기면 냉장고 공간도 훨씬 쾌적하고 반찬도 새 반찬인 것처럼 청결했다.


전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복잡하고 많아 어떻게 하지 하는 심정이었는데 하나하나 살펴보니 실제로 쓰는 것은 반 정도여서 쓰지 않는 전선은 빼서 따로 보관하고 멀티탭은 정리하고 벽에 있는 콘센트에 직접 꽂았다. 겨울잠 자는 뱀처럼 얽혀있어 먼지가 잔뜩 끼던 전선들은 와이어로 묶으니 깔끔해졌다.


물건도 사람처럼 관심이 필요하다. 무관심하게 놔두면 생기를 잃는다. 정리는 관심이고 그 관심이 물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안방 화장실에 갈 때마다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던 장식장을 걷어내니 동선이 경쾌해졌다. 공간이 생기니 기분 좋게 지나다닐 수 있었다. 작은 행복이 정리를 통해서 찾아온다.


남편은 말한다.

"다 버려서 이제 물건도 별로 없고 넓기만 한데 뭘 자꾸 버리고 공간을 비운다고 하는지 참나 이해가 안가네... 놔두면 다 쓸데가 있는데"

하지만 그는 모른다. 여백이 주는 삶의 평화와 안정을. 모르면서 누리고 있다.


새로운 물건을 사면 설레던 마음이 이제는 비우고 새로운 빈 공간이 생길 때마다 설렌다. 통장을 스쳐가기만 하던 월급이 이제는 조금씩 머무르고 남아서 기다리기도 한다.


전에는 새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 여기저기 많이 알아보고 다녔다. 그런데 분양가도 너무 비싸고 분양 신청을 해도 잘 당첨이 되지 않았다.


집은 어수선하고 낡은 가구에 물건은 꽉 차있어 이사를 가면 물건들을 모두 버리고 깔끔하고 통일성 있는 가구로 재배치하여 모델하우스 같은 집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나에게는 빨리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치워도 표시가 나지 않으니 집안일 할 것도 많고 일을 해도 티가 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비우기를 시작하고 낡았다고 생각한 가구들이 내게 다정히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 산 장롱을 아직도 쓰고 있는데 고장 날 때마다 남편이 잘 고쳐놔서 쓰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물건이 꽉 차서 자주 문이 고장 났고 잘 닫히지도 않았는데 물건을 비우니 문도 완벽하게 닫히고 청소도 간편해졌다.


게다가 그 장롱을 사기 위해 다녔던 많은 가구점들과 그 장롱을 만났을 때 마음에 쏙 들었던 기분 좋은 기억도 떠올랐다.


집에 내가 좋아하는 꼭 필요한 물건들만 남기니 물건들이 말을 걸어온다.


처음 만났을 때 기분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새로운 물건들이 집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을 때 보고 또 보고 하며 즐거워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큰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간 기념으로 사준 환한 책상과 침대는 말한다. 어린 아들이 커서 중학생이 된 기쁨에 활짝 웃으며 내 앞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을 다시 한번 보라고...




휴일 아침,

베란다 창으로 햇살이 환하게 퍼지며 들어온다.


방해할 물건 없이 온전히 쏟아져 들어온다. 햇살을 제대로 만나는 시간이다. 내 집은 매 순간 새로 태어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나도 새로 태어난다.


햇살을 바라보며 조용히 외친다.

나는 미니멀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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