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라는개념에 관하여
당당했던 사람이 위축이 되는 공간이 있다. 사실, 해를 줄여주기 위한 공간인데 오히려 해를 당할까 작아지는 공간이 있다. 그곳이 내게는 치과였다. 치과를 가려면 마음의 준비는 두 달 전에 미리 해야하고, 치과를 가는 동안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예약을 부득이하게 펑크를 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니, 치료해주는 공간이 벌을 주는 곳으로 둔갑해버리기 일쑤다.
-일 년 만이죠
-네... 그동안 바빴어요.
무섭다는 생각은 편한 등받이에 누워서 눈을 가리고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이렇게 바뀐다.
-내 치아는 당신 손에 달렸어요. 어차피 왔으니까 부드럽게만 부드럽게만..
그때부터였을 거다. 의사의 손가락이 입술을 가볍게 건드릴 때마다 강한 기계음을 내면서 쇠가 치아에 닿아서 만들어내는 소음은 어느새 풍경의 일부로 사라졌다.
-단 것은 피하고, 하루 세번 구석 구석 양치를 하며...
아버지가 말했던가, 엄마가 말했던가, 잃어버린 메시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부드러운 충고이며 조언이고 어쩌면 의사로 당연한 말 아닌가.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추억을 해본다.
'따뜻한 남자 같아, 어찌보면 아버지 같은 느낌이야, 진짜로 날 걱정해주는 거 같아...'
-네, 네
어느새 순한 양처럼 말을 잘 듣겠다고 끄덕이는 나를 보며 순간 이런 생각을 생각했다.
'전이'야.
어쩌면 다소 늦은 나이, 마흔 일곱에 심리 상담을 배우기 위해 다시 학교에 다닐 때였다. 나보다 어린 학생들이 A학점을 받기 위해 난이도가 있는 과제를 밤을 새며 하고, 학교에 오면 심도 깊은 질문으로 기를 죽이는데,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생계를 이어가면서 대학원 수업을 들었던 나는 과제도 어렵지만 수업 중에 내내 졸았다. 그런 내가 어떤 이미지로 그려졌을지 교수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상담 시뮬레이션 수업을 진행하고 평가를 위해 일대일로 교수실로 오라는 말에, 교수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가방에서 립스틱을 꺼내 다시 바르고, 얼굴을 여러번 들여다 보고야 일대일 면담을 위한 교수님 방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네이비 수트에 브라운 구두를 신고 걷어 올린 소매에 언뜻 언뜻 파란 정맥혈이 돋보이는 팔뚝의 힘줄을. 남편에게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분위기였다. 왜 그렇게 가슴이 뛰었을까.
이 후 교수가 내담자가 되고 내가 상담자가 되는 상담 시연 수업에서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 박동이 너무 뛰어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러 이러해서 제가 살 의욕이 없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나요...?"
떨리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고 내가 어떻게 상담을 진행할지 지켜보는 압박 수업인데, 구구절절 아프다고 호소하는 가짜 내담자에게 이미 나는 기울었다. 그 순간 생각했다.
'전이'야
'전이'란, 정신분석학 용어로, 프로이트에 의하면 과거 타인과의 관계가 정신분석치료에서 분석가를 향한 정서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전이는 '명랑한 은둔자'에서 캐럴라인 냅이 전달하는 전이와 같다. 그녀는 '작은 전이'라고 표현하면서 '전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전이는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숨쉬기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소한 투사의 순간들, 타인을 대할 때, 그것도 종종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아무 맥락없이 우리의 가장 어두운 두려움과 과정이 끌려 나오는 사건들, 우리가 일상의 사교에서 늘 겪는 그런 현상을 앞으로는 '작은 전이' 라고 부르자.
아버지가 백수였고, 남편이 백수였다. 아버지는 불친절했고 남편은 말이 별로 없었다. 유년시절로 돌아가 잃어버린 메시지가 무엇이냐고 묻지 않아도 나는 부드러운 말과 따뜻한 음성을 그리워했고 그 음성을 가진 남자가 맥락없이 던지는 농담에도 흔들렸다.
내게 상담을 받는 주연씨는 지나치게 경비아저씨에게 친절한 자신을 나무라는 남편과 다투었다고 하소연 했다. 늦게 들어오는 남편의 빈 자리에 무거운 택배를 들어다 주거나, 눈이 오는 계단을 쓸면서 인사하는 친절한 목소리에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고. 주연씨에게 경비 아저씨는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였고, 자주 집을 비우는 남편을 대신하기 위해 아파트 입구에서 밤을 새며 불을 밝히는 보호자였다.
사람과 사람의 조합은 무수히 많고, 전이의 대상이 될 만한 상대도 무수히 많다. 자동차 정비사, 아빠. 변호사와 자산 관리사, 아빠. 남자 의사, 아삐. 여자의사, 엄마. 생판 낯선 람도 이런 현상을 끌어낼 수있다. 어떤 때는 상대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희망, 또 어떤 때는 질투,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느낌, 혹은 자신이 부족하거나 어딘가 모자라다는 느낌, 그런 뿌리 깊은 감정들이 떠오르는 것이다.<<명랑한 은둔자>>
문제가 불거졌다. 그 경비 아저씨는 주연씨의 강아지를 유독 예뻐했다. 산책을 나오면 뛰어나와 간식을 챙겨주거나, 주연씨의 애완견이 실수한 용변을 처리해주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본 남편은 경비 아저씨의 행동 하나하나를 미소를 머금고 쳐다보고 있는 주연씨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거리를 둬.
경비 아저씨가 예뻐하는 애완견을 경비 아저씨의 품에서 뺏다시피 데리고 들어간 남편과 그날 크게 싸웠다는데 들어보면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별 거 아닌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알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전이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의 모든 행동의 의도파악없이 다 선하게 보는 것이다. 주연씨에게 경비 아저씨는 선한 사람이다. 거리를 두라는 남편의 말은 전이 감정을 이해 못하는 몰상식한 '분리'의 언어였다.
'전이'를 설명하면서 내면의 아이를 위로 한날, 주연씨에게 [잇쉬가 잇슈에게]라는 찬양곡을 들려주었다. 아담과 하와라는 어원을 가진 잇쉬(남자)가 잇슈(여자)에게 고백하는 축가로 유명한 찬양곡이다. 이런 남자를 만나라고 조언함도 아니고, 초심을 기억해서 잘 살라고 축복하는 것도 아닌, 잇쉬가 잇슈에게 들려주는 축복의 언어가 얼마나 따스한지, 우리는 태생적으로 본능적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에서 아버지를, 따뜻하고 온유한 목소리에서 어머니를 기대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댈 기다리오
스무살의 나는
주께 맡겼다오
사랑이란 내 선택을
이제 잠이 드오
주의 머리맡에
주께 드렸다오
설렘이란 내 감정도
난 이제 잠들겠소
주님이 정한 때까지
당신을 만날 때까지
기다리겠소
행복을 연습하겠소
문 잠긴 동산이 되어
어딘가 있을 그대여
기도하고 기다리네
누군가에게 쉽게 기운다는 것이 '긍휼'을 자처한 선한 사람이라고만 명명할 수 없다. '전이'가 잘 된다고 유년시절의 잃어버린 메시지를 지금 회복하고 있다고 규정할 수도 없다. 다만, 성별이 다른 누군가가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을 때, 한번쯤 생각해봐야한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 아담과 하와가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처럼 그 어떤 악성은 보이지 않고 미소와 웃음으로만 대화하고 있다면 우리는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외로워요..
-제가 지금 힘들어요...
솔직한 진짜 감정을 말하는 그 빈번한 자기 고백이 건강한 소통으로 자리잡아 간다면 나의 남편은 잇쉬가 되고 나의 아내는 잇샤가 될 것이다. 쉽지 않을 수 있다. 감정은 오래 억압되어 이미 진흙 상태 일 수 있고, 진흙을 걷어내고 투명한 마음을 보여준다고 해도 상대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전이가 되어버린 잇쉬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표현해야 한다. 나를 품어주는 사람은 치과 의사도 교수도 경비 아저씨도 아닌, 가장 가까운 내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잇쉬가 되고 잇슈가 되어서 오해받지 말자.
이쯤에서 가장 가까운 나의 잇쉬와 잇샤에게 제대로 '전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