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옛날 일이잖아요.

왔다가 가버린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by Sabina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길게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누군가에게는 미움조차


억압이라는 단어와 억제라는 단어를 비교해서 설명해주는 날, 그녀가 유독 많이 뱉은 말이 있다.

다 옛날 일이잖아요.

그녀는 나를 잘 못봤다. 그녀가 가볍게 내 뱉은 문장이 마스크 뒤에 숨어서 굳이, 지금, 그때,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다고 일축하고 상담을 온 목적은 '말이 없는 아이'의 마음을 알고싶을 뿐이라고 해도 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녀는 오해하고 있었다. '말이 없는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아이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역사를 털어놔야 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습관적으로 억압을 하는지 억제를 하는지 알아야했다.


억압은 의식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자동적으로 행하여진다. 이 점이 의식적 ·의지적으로 행해지는 ‘억제(抑制)’와 다르다. 억압의 결과, 고통스러운 사고 ·관념은 의식 안에 존재하지 않게 되지만(망각되어) 그 힘은 없어지지 않고 무의식 안에 남아서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 실언(失言) ·익살로 나타나거나, 꿈에 나타나거나, 노이로제 증세로 나타난다.

억제란 의식적·의지적이므로 무의식적 억압(repression)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의식적인 억제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생하며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두 가지 욕망(어떤 행동을 하고는 싶으나 했을 때 자신이나 타인에게 옳지 못한 경우)을 경험할 때 특히 잘 나타난다. 때문에 분석심리학에서는 초자아(양심)와 이드(원초적 욕망)를 중재해주는 무의식적 기제로 보기도 한다. -지식백과


억압을 통해 잊어버렸던 내용들은 나중에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게 된다. 부모에 대해서 분노감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던 대학생들이 35년이 지나자 거의 대부분 아팠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부모로 인해 받았던 상처를 고백했다는 미국 대학 사례도 있다. 도저히 견뎌 낼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적어도 잊고 지내는 동안만큼은 내면의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억압도 적응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고, 합리적인 방어기제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억압은 날이 개고 나면 간밤에 천장에서 비가 샜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와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억제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세차게 불어닥치는 바람을 피하기보다는 그 바람의 흐름에 배를 맡기고서 항해하듯이 세상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억제는 "내일 해가 뜨면 다시 생각할 거야"라고 말하고 나서 다음 날 잊어버리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다시 상기한다는 점에서, 마냥 묻어 둔 채 생활하는 억압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스크 뒤에 숨은 우울이 보이고, 마스크를 벗어도 웃지 않았던 그녀는 억압을 하는 것일까, 억제를 하는 것일까. 위기의 상황에서도 평상시처럼 긴장감을 이완한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면, 좌절 상황에서도 특별한 묘안을 찾아다니지도 않는다면 그녀는 억제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말이 없는 아이'가 답답하다고 찾아왔다.


웃음이 사라진 그녀에게 도화지 한장을 건네고, 사각형을 그리라고 했을 때 그녀는 사각형에서 창틀로 변하는 그림을 완성했다. 아이의 마음을 읽고 아이와 건강한 소통을 하고, 아이가 잘 크길 바란다면 어머님의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조언에 그녀의 그림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이 출근하고 집안일을 끝내면 커피 한 잔을 내리고, 그 커피가 식어가는 줄 모르게 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고 했다. 창틀에 팔을 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자체로 평안이 찾아온다고 했다. 이쯤에서 추상적인 문장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명료화 해주어야한다.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그냥...나무를 보고 주차된 차를 보고, 나가다가 다시 들어가는 사람을 봐요.

-나가다가 다시 들어간 사람이라면?

-무언가 두고 온게 있다는 거겠죠...


긴 상담끝에 그녀가 말했다.


-저를 거쳐간 사람이 참 많아요. 길게, 짧게 그리고 사랑을 했고 미워도 했고, 미움 조차 없는 사람도 있고...

그녀는 일기를 쓰고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수련한다고 했다.

-생각이 많은 유형입니다. 그 생각을 정리해서 말해주시겠어요? 어떤 사람이 떠오르나요?

-왔다가 가버린 사람이요.

-남자인가요?

-남자...죠.


다시 옛날 일이라고 일축해버릴까 그녀에게 도화지 한장을 건네고 웅덩이를 그려보라고 했다. 그녀가 건너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더러운 웅덩이, 그 곳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투영 되었고, 집에 두고 온 물건을 찾기 위해 잠시 들렀다 영영 보지 못했던 아버지는 그녀에게 왔다가 가버린 사람이었다. 결혼 해보니 아버지를 닮은 남편은 말이 없고, 아침에 나가면 밤에 들어오는 손님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5회의 상담끝에 그녀는 변했다.


옛날 일이라고 치부했던 과거가 그림으로 살아나고, 가슴 저 밑에 숨어 있던 이야기가 터져 나오자 그녀는 가장 솔직한 언어로 말했다. 아들만큼은 자신의 아버지나 남편과는 다른 사람이길 바란다고, 말이 없는 아이가 답답한 것이 아니라 말이 없는 아이가 자기와 분리되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이 없는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녀의 아들은 말이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말 없는 부모 사이에서 이유도 모른채 사춘기를 겪고 있을 뿐이었다. 다정한 말을 나눌 기회조차 없는 조용한 집에서 아이는 컴퓨터와 대화하고 있었다. 아들의 입을 통해 그려지는 가족의 풍경에 그녀는 참고 다 들어주었다. 억압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질책하고 싶은 말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들, 엄마가 미안해...


원 억압이라고 있다. 아동기에 발생하는 억압으로 아동의 정신 기구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데 기인한다. 원 억압으로 인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는 해리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아동기 삶의 기억을 상실하는 '정상적인' 기억상실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문제는 민낯이 가장 잘 드러나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억압된 과거는 과흥분이나 불안 그리고 갈등의 형태로 고통스러운 정서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고통스러운 정서가 있다면 간과하지말고 내면의 아이를 만나야 한다. 더불어 잃어버린 메시지를 찾기 위해 상담을 받거나, 내면을 다스리는 마음 수련을 하면 좋다.


-요즘도 창가에 턱을 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나요?

-네...

-무엇을 보나요?

-커피를 마시면서 푸른 나무가 주는 생기를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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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부했다. 이제는 억압하지 말고 다 말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확인했다.

-더 하실 말씀 있나요?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다 옛날 일이잖아요.


농담을 건네며 마스크를 다시 쓰고 나가는 그녀의 눈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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