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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Sep 18. 2022

어느 장애인의 오밀조밀

의미없는 먼지보다는 재가 되리라.


의미 없는 먼지가 되기보다는 찬란한 재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다. 그가 남긴 시의 문장으로 인해 내 남은 삶에 주어진 날을 허비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졸린 듯 영원한 행성보다는 차라리 떨어지는 최고의 별똥별이 되어 장엄한 빛을 발하리라"


태어나자마자 생부의 외면을 받고, 소년기에 통조림 공장에서 18시간 노동을 하고, 양식장의 굴을 약탈하는 어린 해적이 되고, 직업 선원이 되어 긴 항해를 하기까지 뼈저리게 가난했던 그가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면 어김없이 책이 가득한 도서관이었다고.


19살에서야 중학교에 입학하고 버클리 대학에 입학도 했지만, 그를 뜨겁게 해주는 반려의 직업은 글 쟁이었다. 성과를 드러내는 숱한 결과에도 돈이 안되는 가장 가난한 직업, 작가를 선택한 사람, 그가 '잭 런던'이다.


그가 쓴 책, [마틴 에덴]. 하필이면 마틴 에덴 영화를 먼저 보았고, 그로 인해 책을 펼칠 때마다 마틴의 큰 눈이 머무는 루스의 우아한 파란 눈둥자가 어른거린다.




잭 런던의 소설 [마틴 에덴]은 잭 런던의 자전적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은 소설이다. 마틴과 루스의 사랑이라는 주요 내용에 작가가 되기 전 고난의 경험을 담고 있다. 사랑한다면 모든 역경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계급적 차이를 비롯 모든 가치관이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현장이 바로 사랑이다. 이 소설을 두 단어로 압축하면 '헤어질 결심'의 탕웨이가 어눌한 한국어로 외쳤던 '추앙'그리고 '붕괴''다. 노동자의 노래인 랙타임을 들으며 성장한 남자가 클래식을 들으며 성장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남자는 '추앙' 하는 여자의 삶으로 들어가 부르주아 문화를 습득하고 최고의 작가가 되리라고 결심한다.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싶어요."


아름다움을 동반하는 '붕괴'는 도처에 있다. 타고난 계급의 껍질을 벗고 다른 계급의 껍질을 입는다는 건 필연적으로 '붕괴'를 동반하는 건 아닐까? 마틴이 진정 가고자 하는 곳이 '에덴 (Eden, 천국)일까? 영화와 다른 결말을 기대하며 [마틴 에덴] 책을 조심스럽게 펼쳐본다.





#마틴에덴 #잭런던 #마틴에덴책 #마틴에덴영화




"굶주린 이가 음식을 볼 때 그렇듯 그의 눈에 애절한 동경과 갈망이 곧바로 떠올랐다. /P18"



미군부대 웨이트리스 엄마는 주 5일을 미군부대 레스토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이층 양옥집을 살 만큼 시대(thereabouts)가 주는 행운의 돈을 벌어들이기까지 엄마는 바빴고 엄마는 예뻤다. 백수 남편보다 돈을 잘 버는 엄마는 집을 샀고, 동네잔치를 열었다. 그날, 이층 양옥집 구석에 잠시 잊힌 아이는 고열에 시달렸다. 그때 내 나이가 두 살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감정에서 비롯된 좌절감은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는 무의식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에니어그램' 이론은 말한다. 에고 발달에 있어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독립적이 되는 방법을 배우는 시기인 '분리 단계'가 에니어그램 7번 유형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백수 남편 대신 돈을 벌어야 했던 엄마는 두 살배기 막내를 5살이 더 많은 언니에게 맡기고 집을 비웠다. 어린아이가 분리의 과정을 관리하는 한 가지 방법은 변화의 대상(transitional object)에 집중하는 것.


7번 유형은 흥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경험, 아이디어, 사람들, 장난감 등으로 옮겨 다니며 내면의 좌절감을 억제한다. 이후 '가난'이 물려준 분리의 경험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변화의 대상이 음식으로 옮겨간다.


"엄마! 왜 냉장고에 자물쇠를 달았어? 냉장고가 열리지 않아!"


에니어그램 이론은 말한다. 좌절, 공허함, 뭔가가 부족하다는 느낌 때문에 스스로를 외부의 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감정적인 반응이 '폭식'으로 이어진다고.


마틴 에덴은 굶주린 이가 음식을 보듯, 여자를 보고 여자의 삶을 동경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매끄럽게 흘러나오는 생소한 단어들과, 그에게는 너무나 이질적이지만 정신을 자극하고 들척이게 만드는 비평 구절과 사고의 전개가 힘들기는 했어도, 그는 이해했다. 여기 지적인 삶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꿈도 꾸지 못했던 온화하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었다./P25"



군부대 웨이트리스에서 공장의 여공이 되기까지 엄마는 더 바빠졌지만 가세는 기울었다. 여전히 아버지는 무능한 정권을 탓하며 밤낮으로 술을 먹었다. '가난'하니까 집에만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장애인'이니까 숨어있으라고 말했다. 한 줄기 빛만 있어도 좋은 어두운 다락에 숨어지내며 이름 모를 그 누군가가 두고 간 세계의 석학을 만났다. 그 책에서 사람을 만났고, 신기루와도 같은 흔들리고 떨리는 환영을 경험했다.


"식사 후에 그녀는 그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를 겨냥하여, 둘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어렴풋이 담아 공격적으로 피아노를 쳤다, 그녀의 음악은 그의 머리를 잔인하게 갈기는 곤봉이었다./p41"



'가난'을 탈피하려는 시도는 끝도 없는 공부, 공부, 공부로 이어졌다. 허기를 채우듯 책을 읽고, 꿈을 꾸듯 하루를 살았다. 결과적으로 '돈'이 있는 남자를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고, 생명력 없는 두 개의 나무 목발조차 나의 굴레에서 떨어져 나갔다. 책의 힘은 언어의 힘으로 이어지고 꽃보다 예쁜 스무 살 그 무렵의 나는 로맨스를 당기는 페로몬이 넘쳐흘렀다. 심지어 힘없는 발뒤꿈치는 춤을 추듯 남자에게 기울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들고 있는 목발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맞지 않는 옷,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100미터를 걸으면 반드시 호흡을 가다듬고 쉬어야 하는 장애는, 사랑을 읍소했던 남자들의 호기를 객기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나와 다른 세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마틴 에덴을 새로운 인물, 신기한 개인으로 여겼으며, 그가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의 실체가 그 새로움과 신기함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물원에서 야수를 구경할 때, 휘몰아치는 폭풍을 보거나 하늘을 가르는 번갯불에 몸서리칠 때, 비슷한 방식으로 특이한 느낌을 겪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온 그는 광활한 공기를 거침없이 호흡하고 있었다./p101"


4번째 연애를 하고 나는 그 남자와 결혼했다. 그에게는 우주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적도 태양의 화염이 얼굴에서 이글거리고, 탄력 있는 근육에는 태곳적 생명의 활력이 꿈틀거렸다. 물론 그때는 몰랐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이 '독서모임'이고 그는 그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발제하고 있었다.



"유화 한 점이 그를 사로잡았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돌출된 바위를 뒤덮으며 부서지고 있는 그림이었다. 낮게 깔린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파도 너머로는 범선 한 척이 비바람치는 황혼의 하늘을 배경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세로돛을 활짝 펼친 배는 갑판이 샅샅이 다 보일 정도로 기울어져있었다. 거기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색한 걸음걸이도 잊고 그림에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화폭에서 아름다움이 사라졌다.(...) 물러섰다. 순식간에 모든 아름다움이 화폭에 되살아났다./P18"



쉰하고 다섯, 지금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남편의 빈자리, 구순의 노모, 여전히 장애인, 그럼에도 도전하고 열정적으로 휘몰듯 살아가니 멋있다고. 위태하게 걸어가도 넘어지지 않고, 울고 싶어도 먼저 울어버리는 사람을 품어주고, 폭음과 폭식의 굴레를 벗어나기까지 나는 내 삶을 샅샅이 다 보여주었다.


나의 에고는 말한다."네가 살아있는 느낌과 충만함을 가장 많이 가졌던 순간을 생각해 보라" 고.


방을 청소하고 커피 한 잔을 내리는 순간,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축복으로 놓아 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순간, 우연히 발견한 보석 같은 책에서 이런저런 밑줄이 모여 나와 똑같은 인물을 탄생시키는 순간. 그 순간에 나의 삶이 숨을 얻는다.



덕지덕지 칠해진 나의 그림이 살아난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모양 저 모양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저 감탄이다. 모비딕 향유고래의 흰 물보라처럼 휘몰아친다. 자잘한 먼지처럼 살았다. 창문도 없는 어두운 다락에서 먼지 날리는 누런 책장을 넘기며 꿈을 키웠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나는 먼지보다는 재가 되리라.


(...)


존재가 아니라 사는 것이 곧 인간의 본분일지니


나는 생의 연장을 위해 주어진 날들을 허비하지 않으리


내게 허락된 시간들을 모두 쓰리라/ 잭 런던 [먼지가 되기보다는 재가되리라.]




"아름다운 가을날이 왔다. 따뜻하고 나른하며, 계절의 바뀜으로 잔잔히 설레었다. 태양은 뿌옇고 부드러운 바람결이 대기의 선잠을 깨우지 않으면서 어슬렁거리는 캘리포니아의 인디언 서머였다./p237"


마틴의 마지막이 에덴[iden, 천국]이 아니면 어떠리, 그의 눈빛이 그의 언어가 그의 몸짓이 내 글에 녹아들고, '가난'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글쟁이가 자기였다고 고백하는 '잭 런던'의 바람이 고스란히 이루어졌으니.


지금 이 순간 나는 에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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