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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Sep 26. 2022

어느 장애인의 오밀조밀

인터뷰 1.

잎 새는 꽃 없이 돋았다 지고 꽃은 없이도 혼자 피었다 진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꽃을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제 안에서 키운 꽃이라 했다. 


살집이 없는 깡마른 몸매에 어깨는 말하지 못한 언어가 배려로 만들어져 좁게 굽어 있었다. 그녀가 입은 폴로 랄프로렌 꽈배기 스웨터는 초록색이었다. 뒷 밴딩으로 잡아 낸 폭이 넓은 검정 롱 스커트는 검은색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말하지 않은 게 많아요. 굳이 말하려고 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혼자 피었다 지는 이름 모를 들꽃, 그녀 안에 한 무더기의 꽃이 보였다. 제 스스로 피워내는 아름다운 꽃의 향기가 내 코끝을 스쳤다. 


"저에게 다 말해 주세요. 힘들었던 일, 기뻤던 일, 제가 멘토가 되어드릴게요."





[전쟁과 평화]에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개개인은 각기 목적은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전체의 목적에 봉사하기 위한 존재에 불과하다.
꽃에 앉았던 벌이 아이를 쏜다. 아이는 벌을 무서워하며 벌의 목적은 사람을 쏘는 거라고 말한다. 시인은 꽃받침에 달라붙어 꿀을 빠는 벌을 보고 감탄하며 벌의 목적은 꽃향기를 마시는 거라고 말한다. 양봉가는 꽃가루를 모아 벌집으로 가져오는 것을 보고 벌의 목적은 꿀을 모으는 거라고 말한다.(...) 식물의 이동을 관찰하며 이 이동에 협력하는 벌을 본 또 다른 관찰자는 이것이 벌의 목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벌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지혜가 발견할 수 있는 제1, 제2, 제3의 목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목적들을 발견하는 인간의 지혜가 높아질수록, 궁극의 목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명백해진다./전쟁과 평화 4권 문학동네 P385

우리가 바라보는 현상만으로 완벽하게 무엇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겠지. 톨스토이가 덧붙인다. "인간은 다만 벌의 생활과 그 밖의 생활 현상의 상관성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생각의 유한성과 한계점이 숙성되기 전에 드러나면 갈등과 전쟁으로 야기되는 상황을 읽어가고 있다. 대작을 쓴 대가 톨스토이의 문장을 읽으면서 사람의 변덕과 은밀한 혐오를 다른 차원으로 이해했다. 그럼에도 사람을 상대하는 상담가이며 과외 선생인 내가 대작의 밑줄이 모인다고 해서 성스러운 삶을 쉽게 살아낼 수는 없었다. 사람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듣고 공감의 언어로 화답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이 더해지면 그와 그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다시 무너지는 일상이 일어났다. 톨스토이의 조언과 더불어 그 이상의 지향점이 필요했다.


고영민 시인의 말처럼 제 안에서 스스로 피었다 지는 울고 웃어야 할 이야기들을 탑을 쌓듯 저축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불평 없이 나의 처지를 견디는 관조의 삶은 어둡고 장엄했고 빛났다. 그때 만난 사람이다. 그녀는 초록색과 검은색을 즐겨 입고 가끔은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둔 나이보다 10년은 더 어려 보이는 얼굴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러 왔다.


"나는 재혼했어요."


자신의 처지를 견뎌 낸 길은 어두운 기분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 그 기분을 유지하면서 이야기했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그녀의 과거 이야기가 몇 개의 전혀 다른 세계로 이어지고 그 이야기는 각 개성을 지키고 양보하며 조화로 이어졌다. 벌의 목적이 쏘는 것이라고, 꿀을 먹는 것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려워졌다. 아이를 위해서 재혼했는지,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기 위해 했는지, 남편의 빈자리가 외로워서 했는지, 전부 추측일 뿐이다. 그녀의 과거는 그녀가 늘 입고 오는 초록색과 검은색 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나는 단편적 이야기에서 가슴 두근거리고 슬픔과 기쁨이 넘쳐흐르는 순간만을 만들 뿐이었다. 나와 그녀의 만남은 상담가와 내담자가 아니고, 작가와 글쓰기를 배우는 학생이 아니고, 우정을 나누는 벗이 아니라 치마 단이 낮은 단화의 끝 무렵에서 펄럭일 때 아름답다고 외쳐주는 순간이 필요한 찰나의 연인이었다. 그렇게 1년, 2년, 3년이 넘었다.


"제가 언니의 책을 출판해주고 싶으나... 동력이 안돼요. 우리 투고해요."


한 무더기의 아름다운 꽃이 묻혀서는 안 되기에, 제 안에서 피었다 지는 꽃을 먼저 발견한 사람이기에, 68세의 나이에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꿈꾸며, 각기 다른 목적의 삶을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에니어그램 9번 유형 윤서라, 나는 그녀의 책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오늘 날씨는 좀 따뜻해요, 작가님."


안티구아(Antigua) 지역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스모크 커피이며, 커피나무가 화산 폭발에서 발생하는 질소를 흡수하여 타는 듯한 향을 가진 스모크 커피의 대표, 나는 과테말라 커피를 좋아한다. 적당한 산도와 달콤한 맛, 풍부한 바디, 살아 숨 쉬는 듯한 아로마 향이 있다.


"진한 아메리카노 대신 오늘은 드립으로 마셔보세요. 제가 살게요."


그녀가 내미는 것이 과테말라 커피뿐이랴. 제철과일과 반찬, 그리고 고가의 책이 있다. 걱정을 사서 하는 전쟁과 평화 니콜라이를 두둔하고, 한결같이 섬기는 소냐를 걱정하며 아버지와 분리하는 공작 영애 마리야를 응원하며, 그렇게 쌓아 온 찰나의 순간이 우정의 퇴적을 단단하게 하고 있다. 감사할 뿐이다.


찰나의 순간이 경건의 밤까지 이어지면 그녀는 그림을 그린다. 그녀의 옷 색깔이 정해져 있다면 그녀의 색 그림은 다양하다.







나의 슬픔까지도 읽어 낸 그림.

스치듯 지나간 사람은 인연일까... 지금까지도 내 옆에 남아있는 사람만 필연일까... 오해를 안고 있는 그와 그녀는 악연일까... 끝없이 이해하고 품어주는 사람만 선연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침, 점심, 저녁을 매 끼니 준비하고 쉬는 시간에 봉사를 하고 늦은 오후에 책을 펼치고 잠자는 게 아까워 미치겠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그래도 푹 자야 합니다." 걱정과 기도를 담은 말을 하는 순간이 좋을 뿐이다. 그로인해 그녀는 나의 선한 인연이다.




거동이 불편하니 가고 싶은 곳은 온라인으로 투어(tour)하고, 쌓을 곳이 없어서 내다 파는 책이 많아도 자꾸만 책을 사고, 알아내고 이해한 구절을 그림과 글로 오밀조밀 풀어내는 어느 장애인이 있다. 내가 상담사이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 그림을 배우러 찾아오는 사람, 아이의 등수를 올리고 싶어서 찾아오는 사람... 그 수많은 모래와 모래 사이에 오밀조밀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장과 문장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고, 대화가 멈춘 시간의 의미를 이해하고, 때로는 남아있는 능력을 다 써서라도 보호하고 싶은 그 마음까지도 누군가 알아준다면, 나의 오밀조밀은 성공이다.


나의 시선이 오늘은 약국 조제실에서 약 한 알 한 알 허투루 다루지 않는 68세 윤서라에게 머문다. 다시 그녀의 러너스 하이를 꿈꾼다. 있는 자리에서 성실하되 퇴근시간만 기다리는 그녀의 저녁밥상을 그린다. 매 끼니 7첩 반상을 차리는 그녀의 손위에 그녀를 닮은 꽃 향이 있는 핸드크림을 사야겠다. 혹시나 제 안에서 피고 지는 꽃을 발견하지 못하고 한숨지을까 걱정하며 오밀조밀 인터뷰하는 내 마음을 전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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