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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Oct 01. 2022

어느 장애인의 오밀조밀.

온갖 색깔이 더 강렬하게 보이듯,

이건 아니잖아!

P양의 고백이 자동차 본네트[보닛(bonnet)] 위로 올라가 "이건 아니잖아!"를 외치며 울부짖었다고 말할 때, A양과 J양 그리고 나는 각자의 생각이 있는 양 시선을 돌려주었다. 때마침 서쪽 하늘에서 해 질 녘 노을이 붉은색에서 연분홍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오래 사귀었어요. 그렇게 안 맞는 사람하고 그렇게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왜 헤어졌나요?"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어요. 말이 돼요?"


남자의 구차한 변병이 자기 합리화로 이어지고 뜨거운 만남의 끝이 보일 때쯤, 더 이상 만남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낸 여자는,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는 남자를 앞에 두고 자동차 보닛 위로 올라갔다.


P양이 영화처럼 "이건 아니잖아!"를 외친 그날도 오늘처럼 하늘이 예뻤을까.

그날을 상기하는 여자의 얼굴에 눈물이 차올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털어냈던 그녀의 언어가 부드러워졌다. 초록색이 한 가지 초록빛이 아니듯 어느 날은 아쿠아 그린, 어느 날은 민트, 어느 날은 라임으로 살아가는 P양의 하루하루가 다채로워졌다. 이제 그녀의 유칼립투스는 어느 면을 바라봐도 아름답고  화려하다.


P양을 위한 그림과 책.




나는 마음이 아픈 이유를 모르고 억압과 억제를 무의식적으로 채워 넣었던, 그래서 서툰 관계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사람이다. 상담의 방법을 [독서모임]이라는 형태로 하고, 상담의 모양을 [미술심리]라는 형식을 취하고, 그 안에서 읽고 그리고 마음을 나누고 있다. 책을 통해서 문장을 사유하고 각자의 삶에 비추어 헤아리다 보면 어느새 무의식적 반응 기제가 사라진다. 그때 봇물 터지듯 시작된 과거의 이야기는 책을 덮어야 들을 수 있으며,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의 억압과 억제의 과거 이야기가 마치 배가 고픈 것처럼 허기진 얼굴로 바뀌면 내 앞에 앉아있는 내담자의 손을 잡아야 들을 수 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이야기는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 같다.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으며 절대로 섣부른 결론을 내릴 수 없으니 내 마음속 내면 위원회는 끊임없이 속삭인다. "제대로 들어주어야 한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과거 이야기가 특별하지 않아요... 잘 모르겠어... 요. 가끔 분노가 올라오긴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뭐라고 그러셨죠? 좋아했던 남자가 있냐고 물으셨죠...? 느낌이 좋아서 짝사랑했던 남자가 있긴 해요..."

A양의 고백이 다소 서툴고 느리고, 흐린 기억을 더듬어 겨우 알아낸 이야기일지라도, 닫았던 그녀의 판도라가 열리는 순간이니 자세를 고쳐 앉아 어깨를 한껏 오므리고 그녀의 눈빛을 따라 내 눈을 고정했다. 평소에 이중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문장과 비유와 상징이 있는 문장을 찾아 질문하고 자기 질문에 적절한 답을 주되 부드럽게 소통해야 A양의 눈은 반달의 모양을 하고 해맑게 웃었다. 강한 어조와 단답형으로 차갑게 마무리하는 언어는 A양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겨우 끄집어낸 귀한 과거 이야기는 초를 다투듯 바쁜 현대시대에 다소 느린 호흡으로 기다려야 하지만  A양의 이야기는 결국 그녀를 대변하는 역사이기 때문에 완결 스토리를 다 들을 때까지 식물을 관찰하는 자연학자의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게 된다.


"항상 예의 바르고 반듯한 언어로 대화를 해야 진짜 소통인가요?"

"그게 편해요. 게다가 예의 없거나 자기 관념이 맞는 듯 강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불편해요. 부드럽되 확신이 있는 사람이 좋아요. '꼰대' 마인드가 강한 상사가 제일 싫어요."


느린 호흡의 그녀가 긴 생머리를 흔들며 직장인의 애환을 털어놓는다.  마주하기 싫은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 하는 A양의 직업이 애환을 넘어 고충으로 확대되면 영락없이 그녀는 도리도리 긴 생머리를 흔든다. '꼰대' 상사의 이미지를 끊어내는 행위로 보인다.


"다음 책은 문장이 아름다운 책으로 해요!"


아름다운 문장이 필요하다는 건, 정지와 침체와 한탄과 나태가 난무한 현실을 도피하는 공간이 그녀에게는 책이기 때문이리라. 그녀가 데미안을 번역가와 출판사에 따라 여러 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이유일까. 데미안을 발제하는 날, 그녀가 밑줄 그은 문장은 위로와 공감 그리고 부드럽되 단호한, 그녀가 상상하는 이상형의 언어와 닮아 있었다.



좀비가 등장하는 책에서도 A양이 선택한 문장은 비유와 상징을 풀어주어야 하는 문장이었다. 마치 출판사 이름이 '안전 가옥' 이듯 A양은 자기 만의 성을 깨는 일상이 두려워 보였다. 용감한 듯 보이나 연약해 보이는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날, 나의 그림은 안전한 가옥을 찾아 주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밑 작업이 길었다.



집착이죠...!

"왜 하루는 24시간일까요?"


농토를 일구는 시골에서는 사람들이 널리 흩어져 산다. 그들은 길이 나길 기다려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길이 그들의 집을 찾아간다. 24시간을 쪼개고 쪼갠 후에 그 시간의 흐름을 리드하는 J양은 긴 여정 끝에 만나는 외딴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있다. 길 끝 어딘가에 살아도 씩씩하고 용기 있는 여자 옆에는 어떤 남자가 있을까? 어떤 남자들이 그녀를 사랑할까? '사랑'의 개념에 외모를 가꾸는 남자보다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는 남자가 있고, 다른 곳을 바라보기보다는 같은 꿈을 꾸는 남자를 찾고 있는 J양의 과거 남자들은 그녀 말에 의하면 질했다. 하루를 하루로 꽉 채워 쓰는 그녀의 과거 남자들은 그녀만 바라보는 그녀의 일상을 탐지하고 그녀의 시간을 뺏아가는 남자들이었다. 그녀의 과거 남자들은 바쁜 일상 끝에도 맛있는 곳을 찾아가고 극한의 운동을 하며 산 정상에서 아득한 저 먼 곳을 응시하며 '잘 살고 싶다' 읊조리는 그녀를 잘 몰랐다. 이해하고 안아주기보다는 '자기'와 시간을 더 보내기를 원하며 '초'단위로 살아가는 그녀의 시간을 아주 느리고 더디게 늘리고만 있었다. 자기 마음의 불꽃만 바라보라고 외치는 남자들, 그들은 그녀에게 집착했다. 무슨 색을 좋아하고 어떤 맛에 매료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질문은 "어디야?" "언제 와?"...


J양의 결연한 의지는 무너졌다. 그리고 그녀가 내린 결론은 '나 자신이 이끄는 대로 살자'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마음에 불꽃이 피어나면 그녀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다. 몸이 보고 듣는 여행을 하면서 내면을 다지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저 따르고 누리는 일상, 그럼에도 인생이 순탄하고 아름다우면 좋겠지만,


"가끔 너무 외로워요..."



다시 한번 그녀는 자신의 퍼스널 컬러를 찾아 떠났다. 마음 가는 대로 그려 낸 그녀의 그림은 온통 핑크빛이었다.  편안한 인디핑크와 홍조처럼 발그레한 분홍빛이 보라색 주변을 서성댄다.


J양을 향한 질문과 위로가 느려져야 할 시점이다. 벌이 꿀을 먹고 있는 꽃의 줄기를 잘라 벌과 함께 통 안에 가두고 시간에 맞게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면 그 안에 수많은 벌이 모여든다.


이미 가진 게 많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이 있다. 24시간을 쪼개지 말자. 어느 날은 하루를 48시간처럼 자도 되고, 어느 날은 24시간을 꽉 채워 놀아도 된다. 핑크와 보라색 사이 문득문득 보이는 파란 기운을 잡아보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고요한 가을 하늘을 큰 눈에 가득 머금어 보자. 너무 파래서 눈이 시리다면 울어도 좋다. 열었다 닫는 인생의 여정이 단단해지는 날, 수많은 벌이 꽃의 꿀을 찾아온다면 골라보자. 집착과 사랑을 구분할 줄 아는 J양의 안목에 맞는 그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날, 벌마다 다르게 찍혀있는 반점까지 구분할 수 있다면, 내가 건네 준 그림, 몽마르트르 언덕은 그녀의 것이다.




사람의 유형을 파악하고, 성격에 맞는 처방을 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울고 웃는 그 자리에 내가 있다. 세상 온갖 색깔이 있다. 그 색에 맞는 사람, 사물, 자연을 보면서 울고 웃는다. 감히 말할 수 있는 건 온갖 색깔이 다 다르게 강렬하다는 것이다. 초록의 기운을 가진 사람이 하얀 기운을 가진 사람을 사랑할 때, 색의 기운이 흐려질까? 강렬해질까? 답은 없다. 강렬한 기운을 만드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며 흔들린 하루를 세우는 사람도 결국 자기 자신이기에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온갖 색깔은 더 강렬하다.


의자에 앉아 하루를 점검하는 저녁시간이 스산하다. 쌀쌀해지는 밤이 오기 전에 나만의 퍼스널 컬러가 필요하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나만의 색을 찾아 물감을 짠다. 그림을 그리다 지치면 나만의 책을 편다. 오늘도 퍼스널 컬러가 다채롭다. 이렇게 생각이 많은 날은 가장 아끼는 까르투하 고블렛 와인 잔에 까베르뇽 소비뇽 한잔 따르고 취하고 싶다. 취해야 보이는 게 또 있나보다. 오밀조밀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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