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집식구는 모두 다섯이었다.
주인집 아저씨, 아줌마, 미선언니, 진희 오빠,진구오빠.
주인집 아저씨는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퉁퉁한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로 말수는 적었다. 일요일 안채마당에 런닝 차림으로 세수를 하러 앉아 있는 모습을보면 왠지 장기의 빨간 "왕"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아줌마는 산동네에서 드물게 집주인 유세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항상 푸근한 미소를 가진 사람. 나는 심심하거나 혹은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해서 갈때가 없을때면 안집으로 갔다.안채의 부엌문에 쪼그리고 앉아 아줌마가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어떤 날은 빨래를 삶고 계셨고 어떤 날은 김치를 담그고 계셨다. 가끔은 "아줌마가 김치했는데 맛 좀 볼래?"하고 새로 막한 김치를 입에 넣어주시기도 했는데 그 맛이 참 좋았다.
아줌마는 그렇게 인심이 넉넉하신 분이라 안채에 놀러가면 언제든 간식거리를 조금씩 내 주시기도 하고 내 기분이 안좋은 날에는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도해주셔서 어린 내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
미선언니는 앞에 잠깐 언급했듯 이집의 큰딸이다. 공부도 잘하고 쾌활한 성격. 그림도 잘 그리던 나의 롤모델.
진희 오빠는 좀 내성적이라 좀처럼 함께 어울려 놀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착한 성품이고 믿음직스러웠다. 그 이유는...
진구때문이었다. 진구. 이 집의 막내 아들.사실은 한살 많으니까 오빠라 불러야 했지만 여하튼 진구는 그 집에서 유일하게 못 돼먹었다. 자기집에 있는 작은 무엇하나라도 만질라치면 돌고래처럼 소리를 지르고 뺏고 때렸다. 그럴때면 조용히 있던 진희오빠가 "동생한테 왜 못되게 굴어"하면서 진구를 막아서고 내편(?)을 들어 주었기 때문에 당시 내눈에는 국민학교 2학년 진희오빠는 캔디캔디의 안소니처럼 보였다.심술쟁이 진구는 닐과 꼭 닮았다고..그렇게 생각했다.
주인집의 대청마루에는 책이 많았다. 동화책도 있었고 제목을 알 수 없는 전집과 한자로 된 책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곳은 도서관같아서 아줌마에게 이야기만 하면 언제든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던 아빠는 소설책이랑 어려운 책을,조용필 좋아하던 고모는 TV가이드를, 나는 진구의 동화책을 자주 빌려보았다.
단 , 진구가 있으면 야단이 났다.
어느날 고모가 안집가서 TV가이드를 빌려오라고 해서 여느때처럼 아줌마에게 애기하고 책을 뽑아 드는 순간"안돼~~~!!!!"하고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진구였다. 그 자리에 고대로 서 있는데 내손에서 책을 휙 빼앗아 갔다. 나는 선채로 "으~앙"하고 울음을 터트렸고 아줌마가 부엌에서 뛰쳐 나오셨다."왜? 무슨 일이야?" 진구의 손에 들려진 TV 가이드를 본 아줌마는 무서운 얼굴로 진구 등짝을 한대 세게 때렸다.그러자 진구도 으앙! 그리고 TV 가이드를 도로 빼앗아 내게 "얼른 가져가, 괜찮아!"하셨다.
나는 조금은 머쓱해져서 TV가이드를 고모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하고 조금은 심심하기도 해서 안집으로 놀러갔다.
마침 저녁식사 중이셨는데 아줌마는 내 밥까지 차려서 같이 먹자고 하셨다. 은근슬쩍 함께 앉아 밥을 먹는데 진구는 역시나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고 앉았다. 그때 아줌마는 진구 밥에 누르스름한 덩어리와 간장을 숟가락으로 비벼주시는 게 아닌가! 진구의 표정은 어느새 살살 풀어지고 너무나 맛나게 밥을 먹었다. 나는 아줌마가 나에게도 주지 않을까하고 살짝 기다려보았지만 노란 그 덩어리는 다시 신문지에 싸여져 있었다. 평소의 아줌마라면 한번 먹어보라고 하실만도 한데 차마 먹고 싶다는 말은 못하고 그냥 밥만 먹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어와 엄마에게그 노란 덩어리에 대해 물어보니 아마도 마가린일거라고 했다.
"나도 먹어보고 싶어"
"응, 그래...나중에 엄마가 사줄께."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중에도 마가린 밥은 해주지 않았다.
진구네 엄마도 여전히 친절했지만 끝까지 마가린밥은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