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루 출판사에는 없는 것

‘편집자’라는 작은 존재에 관하여

by 나른히
f131914245079088000(0).jpg 출처: tvN <로맨스는 별책부록>(http://program.tving.com/tvn/bonusbook/4/Board/View?b_seq=4&page=1&p_size=10)

몇 달 전 종영한 tvN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라는 드라마는 출판사를 배경으로 한다. 드라마의 사랑 이야기보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출판사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나로서는 원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지만, 깨달은 점도 많았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편집자는 나의 모습과는 달랐다. 편집자가 A4로 출력한 원고를 우아한 자세로 펼쳐 들며 살펴볼 뿐, 책상이 좁아 키보드를 구석으로 밀어내면서 손에 볼펜 자국이 묻은 채 커다란 교정지를 넘기는 모습이 나오지 않아 아쉽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장소가 출판사로 바뀔 때면, 괜히 참견하고픈 마음에 ‘이건 저렇고, 저런 저렇고’ 하면서 가상의 출판사와 실제 출판사를 비교하려 했었다. 그러나 드라마 후반 마케터의 모습에서 나는 참견을 그만두기로 했다. 바로 여러 마케터가 각자 하나의 책을 담당하는 모습에서였다. 내가 알던 마케터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한두 명의 마케터가 매달 나오는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맡으며 여기저기 뛰어다녔을 뿐, 책 하나를 골몰히 살필 시간은 없었다. 돌이켜보니 드라마 속 ‘겨루’ 출판사는 내가 다녔던 곳과는 다른 출판사였다. 규모도 달랐지만, 무엇보다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alfons-morales-YLSwjSy7stw-unsplash.jpg Photo by Alfons Morales on Unsplash

나는 ‘겨루’ 같이 몇십 명 규모의 큰 출판사에 다닌 적이 없다.

내가 거친 곳들은 대부분 직원이 10명 내외인 자그마한 출판사였다. 디자이너를 두지 않는 곳도 있었으며, 편집자가 출고와 디자인을 담당하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큰 출판사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위축되는 면이 있다.

돌이켜 보니, 나를 주눅 들게 했던 것은 규모보다는 회사의 분위기였던 것 같다. 나의 첫 출판사는 몇몇 글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 좋지 않았다. 억압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그곳에서는, 조금이라도 출간 일정이 늦어질 것으로 여겨지는 의견은 낼 수 없었다. 즉, 조금만 수정이 더 들어가면 좋은 책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고 그대로 일정을 진행해야 했다. 모든 책은 두세 달 만에 세상에 나와야 했으니까. 대학교를 졸업한 후 다른 업계에서 일하다 출판사를 들어오게 되었을 때, 출판계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들을 수 없던 나는 어느 순간 그 분위기가 회사의 규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장 책이 나오고 매출이 올라야 하니 편집자를 닦달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어느 날 브런치에서 한 방송작가가 출연자에게 ‘갑’이냐며 한소리를 들었다는 글을 보았다. 정작 그 방송작가는 윗사람의 의견을 따랐을 뿐인데, 출연자에게는 그저 ‘갑’일 뿐이었다는 이야기. 아마 그 출연자는 방송작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다.

편집자도 어떤 면에서는 그 방송작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와 출판사 윗사람의 의견이 ‘무조건 책이 빨리 나와야 한다’는 것이라면, 모든 문제는 편집자로부터 생겨난다. 편집자가 일을 더 빠릿빠릿 처리하면, 편집자가 조금만 의견을 덜 낸다면, 편집자가 작가가 하란 대로 움직인다면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순식간에 외로움을 느끼며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을 때, 드라마 속 겨루 출판사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규모에서 나온 것이라 짐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겨루 출판사에는 편집자를 외롭게 만들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급박한 출간 일정과 일방적인 의견 전달, 그리고 매출에 대한 압박까지. 내가 커다란 교정지에 연신 빨간 동그라미를 칠 때, 드라마 속 편집자는 조그마한 종이 뭉치를 넘겨 볼 뿐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드라마와 현실은 달라’라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그 가상의 출판사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banter-snaps-eY7ETwocMyU-unsplash.jpg Photo by Banter Snaps on Unsplash

드라마가 흥행한 덕분에, 얼마 전까지 들었던 “편집자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해요?”라는 질문을 더는 듣지 않고 지내고 있다. 어느 편집자는 그 질문을 내놓은 사람에게 “편집자는 방송국으로 치면 PD 같은 존재예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방송국 PD의 모습도 위치도 업무도 각양각색이겠지만, PD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편집자는 생각보다 힘이 없는 존재다. 힘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안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로 사장을 압박해서 책을 빨리 내라며 나를 괴롭혔던 작가를 몇몇 만나기도 했으니까.

내가 몇 주간 브런치에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은 예비 작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하고픈 이유가 가장 컸지만, 편집자의 마음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모든 편집자가 같지 않겠지만). 편집자를 거대하게 볼 필요도 없고, 반대로 무시할 이유도 없다. 편집자는 그저 당신의 글이 좋은 책으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 하나로 살뜰히 살피는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많은 분의 응원으로 오늘도 힘을 내고 있다는 마음을 전한다.


커버 사진: Photo by Priscilla Du Pree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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