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사람 컴플렉스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관계는 없다.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어?" 내가 뱉었던 말이다. 하지만 이젠 안다. 사람은 그럴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사랑해야 할 존재일 뿐이니까.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욕구를 들여다보고, 내게 알맞은 관계의 크기를 찾아가는 일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관계를 늘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품는 것. 관계에 주눅 들지 말자. 그것은 결코 나를 위한 일이 아니다.
"호의는 돼지고기까지, 이유 없는 소고기는 없다"는 말처럼, 관계에서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후원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도움이고, 청탁은 대가를 기대하며 베푸는 것이다. 후원과 청탁이 다르듯, 조건이 붙은 친절은 결국 욕심이 된다. 내 행복의 책임을 상대에게 미루면서, 그 희생을 나의 존재 이유로 삼고 있다면, 멈춰야 한다. 타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희생은 결국 나를 소진시킬 뿐이다.
나는 2남 2녀 중 막내딸로 자랐다. "막내라서 귀여움을 독차지했겠네." 그런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첫째 같은 막내였다. 집안에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불려 갔고, 가족들은 나를 가장 편하게 부릴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나의 시간은 언제든 남에게 양보될 수 있는 것처럼 취급되었다. 연습에 몰두하는 시간도, 무대 위에 설 준비를 하는 시간도 그들에게는 그저 한가롭게 보내는 시간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 불려 나가야 했고,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도맡아야 했다.
언니가 출산했을 때, 나는 당연하다는 듯 산후조리를 맡았다. 학교를 쉬어야 했다. 새벽에 아기를 달래느라 밤을 설쳤고, 몸은 늘 무거웠다. 다시 학교에 돌아갔을 때도 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가 아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생활보다 가족이 먼저였다.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결국 망설임 없이 사직서를 내고, 병원에서 밤을 지새우며 간병을 했다. 그리고 병원비는 내 몫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사회에 나와야 했다. 나의 생계를 책임지는 동시에 엄마의 병원비까지 마련해야 했다. 아르바이트와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며,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나는 언제나 ‘착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었다. 내 마음과 싸우는 데 모든 힘을 써버리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이 정말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었을까? 아니면 가족 관계 안에서 '주어진 역할'이라 믿으며,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것은 아닐까? 관계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키면서도 다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 자신을 돌볼 차례다. 관계에 흔들려 나를 잃지 않고 온전히 나로 서서 단단해지는 마음으로. 어쩌면 그것이 사랑의 다른 얼굴이고, 관계의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