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눈물
소녀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여행 가방을 끌고 나온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배가 출항하기 전, 갑판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웃었다. "제주도 가면 뭐 먹을 거야?" "한라산 올라갈 수 있을까?"
그들의 말속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설렘이 가득했다. 선생님은 조를 나눠 숙소를 배정했고, 친구들은 서로 짝을 맞추며 장난을 쳤다. 배는 부드럽게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2014년 4월 16일, 소녀는 119에 전화를 걸었다.
"배가 기울고 있어요."
목소리는 떨렸다. 선체는 점점 기울었고, 물이 서서히 배를 삼키고 있었다. 배 안에서는 여전히 구조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내의 공기는 줄어들고, 바닷물은 차오르고 있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벽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더욱 커졌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꼭 쥐고 있었다. 불이 꺼졌다 켜졌다. 누군가가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괜찮아.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를 구조하러 올 거야." 누군가 말했다. 물이 발목을 지나 무릎을 적시고, 가슴께까지 차오르자 숨소리도 점점 짧아졌다. 서로 맞잡았던 손들이 점차 느슨해졌다. 물은 천천히, 공간을 삼켜 갔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이 물거품이 되어 떠올랐다.
제주공항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서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뉴스 속 화면에서는 기울어진 배의 모습이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그 배를 탈 수도 있었다. 우연히 비껴간 선택이 나를 제주공항에 서 있게 했고, 누군가는 그 배 안에 있었다. 공항의 소음 속에서도 뉴스의 음성이 또렷이 들렸다.
'전원 구조'라는 속보가 떴고, 사람들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어딘가 불안했다. 바다 위에서 멀어지고 있는 배, 아직 남아 있는 목소리들. 배는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속도로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그날, 공항에서 뉴스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현실을 이해하려 애썼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고의 의미는 더욱 깊어졌고,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목소리는 내 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 기억은 쉽게 희미해지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기억저장소를 찾았다. 노란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벽에는 아이들의 사진이 가득 붙어 있었고, 유리 진열장 안에는 누군가의 것이었던 신발과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곳은 추모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살아남은 이들이 이야기를 전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날 밤, 나는 작은 무대에 섰고 '사월의 눈물'이라는 곡을 만들었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의 기억은 희미해질 수도 있지만, 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로 아이들을 기억하기로 했다.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사월의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나는 음악을 통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떠난 자와 남겨진 자의 눈물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남아 우리 곁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나는 한 음 한 음을 정성스럽게 붙들었다. 목이 메어왔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사진들이 천장에 가득 붙어 있었다. 그중 내가 상상했던 소녀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마치 소녀가 나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를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
소녀의 목소리가 사진 속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기억하는 것은 단지 가슴속에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소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는 일이라는 것을.
노래가 끝난 후, 한 아이의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어머니는 내 가슴에 브로치를 달아주셨다. 한 땀 한 땀, 노란실로 짠 리본이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는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이렇게 가슴에 달아주시기만 해도 너무 감사해요.“
누군가 말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땅속 깊이 잠들어 있던 것들이 다시 깨어나고, 닫혀 있던 기억이 벌어지는 시간. 봄을 기다리지만, 어떤 기억들은 되살아나는 것만으로도 아프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때로는 불현듯 찾아와 나를 흔든다. 기억이란 단순한 애도가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그들을 어떻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