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부터 꽤 오랫동안 장래희망은 현모양처였다. 내가 삼 남매로 자랐고 그 시간들이 좋았으니 아이는 셋을 낳을 것이고 살림을 똑소리 나도록 해내리라는 꿈이 있었다. 건강에 좋지 않은 것들로부터 가족들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겠다는 환상과 함께 가정 안의 유토피아를 꿈꿨다. 물론 손 하나 까닥하기 귀찮아하는 어린 내가 현모양처가 무슨 의미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그냥 한번 했던 생각이 이어졌을 것이다. 운이 좋게도 소원대로 자상하고 가정적인 남편을 만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도 낳았지만 어쩐지 어린 시절의 다짐과는 거리가 좀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수 없이 상상했던 가정을 이루기는 했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내가 실제 어떤 모습인지 어린 시절 환상에 빗대어 생각해 봤다.
어진 어머니. 아이가 떼를 쓰기 시작하면 오래지 않아 인내심에는 탄력이 사라지고 감정조절능력은 종잇장처럼 구겨져버린다. 그리고 눈앞의 3살짜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흥분을 조절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미성숙함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내 이름 석자가 아닐까.
지혜롭다는 말 앞에 이렇게 민망해질 줄이야. 앞으로도 이루기 힘들 것 같은 또 하나의 평생소원은 지혜로운 어른이 되는 것이다. 100세 시대에 아직은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30년 안엔 꼭 이뤄보겠다.
착한 아내역도 이번 생에서는 틀린 것 같다. 남편에게 수시로 짜증을 내고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한다. 요리를 할 때 남편의 참여율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자주 잔소리를 한다. 사실 요리를 제외한 빨래, 청소, 육아 등 살림 전반에 걸친 일들을 해내는 비율이 높은데도 ‘명심해 요리는 곧 생존능력이야’라는 말로 기어이 압박을 한다. 마음씨 착한 남편은 다양하고 까다로운 요구들을 대부분 들어주다가 한 번씩 본인의 소원이 궁금하지 않냐며 한 마디 건넨다.
난 다음 생에 꼭 너로 태어날 거야
케이크가게를 시작하기 전엔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때쯤엔 나도 본격 경단녀 대열에 합류할 줄 알았다. 갑자기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생계의 최전선에 서게 될 줄은 몰랐고 심지어 그 일을 임신, 출산, 육아와 함께 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참고로 임신, 출산, 육아는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일+임신, 일+출산, 일+육아는 엄연히 다른 레벨의 퀘스트였다. 그렇게 내 인생에 몰아닥친 작은 쓰나미는 사색의 시간마저 빼앗아갔다. 생각이 깊어지면 도망쳐 버릴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삶의 이치’라는 놈의 눈치 빠른 계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에 걸맞은 질투의 감정으로 성공 타이틀을 거머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지만 내가 무언가를 이뤄내야겠다는 결심은 크지 않았다. 이런 쪽으로는 메타인지가 발달한 편이다. 심지어 천둥벌거숭이 시절에는 늘 시간에 쫓기는 워킹맘을 보고 그 사람의 인생을 짠하게 생각하며 저런 고된 삶만큼은 피하고 싶다 생각도 했다. 일을 통해서 누리는 성취를 모르던 시절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그 생각은 복선이었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첫 비행기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 한숨 돌리던 때. 겨울이었고 출근시간이라 지하철 안은 빼곡했다. 숨좀 고르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경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모든 사람들의 외투가 검은색이고 안색도 코디의 일부인 듯 어두웠다. 거기에 핸드폰 불빛이 얼굴에 반사되어 흡사 공포 분위기 그 자체. 사람들이 개개인으로 보이지 않았고 아이와 함께 집 앞을 산책하며 보던 밤바다의 거대한 검은 물결처럼 느껴졌다. 8~10량쯤 되는 지하철에서 유독 내가 타고 있던 그 칸이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만 시신경을 자극하던 그때의 장면은 웹툰의 한 페이지처럼 아로새겨졌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첫째, 나도 이 사람들처럼 어딘가 쓸모를 찾아 다행이다라는 것과(이 생각을 하던 순간만큼은 흰 옷을 입은 나도 검은물결의
일부분이었다) 둘째, 나의 쓸모를 찾은 곳이 인구 밀도가 아니라 자연의 밀도가 높은 곳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얼른 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인파에 휩쓸려 몸은 피곤했지만 돌아갈 곳이 저 멀리 바다 건너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은 이상한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절대 전문 아내와 전문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 생각은 신생아를 키우며 좀 더 확고해졌고 남편이 아이를 보는 동안 혼자서 야근을 하며 늦게 남아 일해야 하는 사람이 나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나는 확실히 일보다 육아를 어려워하는 성향이었다. 남편보다 아이를 덜 사랑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모성애와는 별개의 개별적 특성 때문이다. 만 3년이 지나고 나니 아이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도 이젠 편하고 익숙하다.
가끔 인생 프로그램에 오류가 난 것이 아닌가 본체를 탕탕 두드려보고 싶기도 하다. 일과 육아에 지칠 때면 삶의 난이도 조절 기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본능의 지배를 받아 살길을 찾는 잘 짜인 운명이려니 받아들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