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런이유지 Aug 30. 2023

자유를 선택한 자의 기쁨과 고뇌

세상이 마련해 둔 견고한 울타리인 회사 조직에 합류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남편과 나의 공통점이다. 나는 길가에 고여있는 빗물처럼 짧고 얕게 회사 생활을 했고 남편은 무경험자다. 직장을 벗어나기로 결정한 모두에게 고유한 사정이 있을 테지만 내가 더 이상 회사에 들어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 고통의 다른 이름, 출근시간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어딘가에 가야 하는 일은 모두 싫다. 학창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것도 등교시간 맞추기였다. 아침에 유독 몸과 정신을 깨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내게 출근시간 맞추기는 정말 크나큰 압박이고 시련이다. 매일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남은 인생 전반의 모든 하루에 불행 한 스푼이 미리 뿌려진듯 막막하고 답답하다. 지금도 물론 출근 시간이 있지만 1분 늦게 지문을 찍었다고 벌점을 내리는 상사가 없기 때문에 4년째 버티고 있다. 늦은 만큼 책임도 스스로 지고 있으니 되도록 일찍 움직여야겠다는 의지가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살아있다.


- 3등급 돼지가 된 기분

 한 회사에서 오래 일한 적 없고 그것도 30살 이전의 일들이었으니 나는 언제나 말단 직원이었다. 상사로부터 부여받은 업무를 처리하면서 주변을 살피며 눈치 보는 것이 내가 퇴근 시간까지 하던 일이다.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어디를 가더라도 말단을 상대로 우월감을 드러내며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런 사람들은 내뱉는 말과 표정에 듣는 사람을 향한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물론 본인이 잘 보여야 하는 사람 앞이라면 예외적이지만. 조직 밖이라면 완벽한 타인이었을 저 인간이 직장 상사라는 이름으로 나를 포함 본인보다 직급이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태를 참아야 할 이유를 도저히 찾지 못했다. 등급표 제일 아래에 있는 돼지가 된 기분을 느낄 때면 돈이니 미래이니 하는 불안들도 나를 붙잡지 못했다.


- 개인적인 성취는 없고 내 아까운 시간만 소비된다는 느낌

 회사일이란 결국 남 잘되라고 죽어라 힘쓰는 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집채만 한 기계의 저기 저 보이지도 않는 나사 하나쯤이 내 위치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직장 생활을 배움의 기회로 삼았으면 좋았을 테지만 당시 내 위치와 깜냥은 그 정도로 고차원적이지 못했다. 기회만 되면 관심분야를 찾아다니며 수업을 듣기도 했다. 회사를 벗어나야 자유롭게 인생의 보물 찾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 부족한 가족과의 시간

 직장에 다닐 때 결혼한 동료들을 보며 하루 중 가족과 식사하는 횟수를 가늠해 봤다. 바쁜 아침은 50%(아침잠 많은 나는 0%), 점심은 0%에 가깝고 저녁도 50%쯤 돼 보인다. 핑계에 따라 그 확률은 줄거나 늘어난다. ‘그래도 아침(혹은 저녁)은 가족들이랑..’ 이라던가 ‘1주일에 한두 번은 가족이랑..’이라는 말은 어쩐지 슬프게 들린다. 언젠가 가족이 생긴다면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날이 많았으면 했다. 그 바람 때문인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거의 모든 끼니를 함께하며 살고 있다. 매일 붙어있으면 싸우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대화가 깊고 넓어져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싸울 일도 줄어든다.


그 외 낮잠을 잘 수 없다는 점, 음식 먹는 속도가 너무 느려 도저히 동료들과 식사 속도를 맞출 수 어렵다는 점, 사회인에 걸맞은 그루밍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점, 답답한 의자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세 가지가 결정적이다.


자본도 든든한 배경도 없는 나는 울타리를 짓기 위한 나무의 씨앗부터 심고 가꿔야 한다. 내 나무만 가꿀 수 있으면 좀 쉬울 텐데 온갖 해충과 잡초들까지 모두 관리하고 있다. 모양은 투박하고 속도는 더디지만 원하는 대로 나무를 다듬어 울타리를 세워갈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너무 지치고 힘든 날에는 세상이 생계라는 이름으로 내려준 벌칙을 받는 것 같다. 고되고 힘들 때마다 힘든 이유를 이분법적으로 둘로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고도성장 시기를 살며 고도로 성장할만한 사업이나 직업을 획득하지 못한 조상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라는 것(조상 탓)과 또 하나는 내 멋대로 자유롭게 살기 위한 책임을 지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 유무형의 유산 상속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창 많이 듣던 시기에는 조상 탓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해보니 제로섬게임(한쪽의 이득+다른 쪽 손실=제로) 조차도 되지 못한 채 상처만 남게 되어 그만두었다.




어제 아침에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놀다가 넘어지며 앞니를 부딪혔다는 전화를 받았다. 잇몸과 입술이 붓고 치아가 흔들리며 피가난 다는 말에 기겁하여 치과에 다녀왔다. 새벽에는 아빠가 돌아가신 꿈을 꿔 눈 뜨자마자 핸드폰을 열어 해몽부터 뒤져봤다. 다행히 아이의 상처도 심각하지는 않았고 꿈도 길몽이라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한 주가 시작되는 수요일. 창밖은 멈출 기미가 안 보이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맑은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기에 비를 바라보는 마음엔 절망도 희망도 없이 덤덤하기만 하다. 인생의 흐름도 날씨를 보듯 그저 예사롭게 관망하는 자세로 대한다면 오늘의 꿉꿉함도 좀 견딜만해지겠지.

이전 10화 인생 프로그램에 오류가 난 것 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