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100일쯤 지나자 내 품의 작은 존재가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기의 밤잠도 많이 길어져서 수면부족과 함께 종적을 감추던 이성도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여전히 전전긍긍했지만 약간의 모성도 생긴 것 같다. 모성애 부족한 엄마로 남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이대로라면 보통의 정서에 부합하는 어머니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아이를 기르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기꺼이 모든 고생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는 어른들의 말이 조금씩 와닿기까지 한다.
그날도 밤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빈 그릇만 남은 식탁에 앉아 멍하니 밥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쩍 음식을 남기는 일이 잦은 시기였다. 위와 목구멍이 서로 담합이라도 한 듯 갑자기 식욕의 문이 닫혀버리곤 했다. 분명 산후 우울감은 떨쳐냈다고 생각했는데 먹는 즐거움이 왜 사라졌나 고민했다. 그러자 방금까지 멀쩡히 사용했던 그릇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어디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내 앞에 놓인 그릇들의 출처가 다이소와 이케아와 대형마트 할인코너였다는 사실이 심히 언짢다.
가게 일만 해도 노역인데 심지어 이 새벽에 밥까지 하고 있잖아?!
이런 싸구려 그릇에 음식을 담아 놓으니까
음식을 만드는 내 수고와 정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야.
그릇을 바꿔야겠어!
뜬금없는 보상심리에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 맞는 말인 것 같아. 일상 속에서 좋은 경험을 하며 사는 건 늘 중요하다고 생각해. 사고 싶은 거 사. 마음에 드는 예쁜 거 골라봐”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각,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마음이 지친 기색 위로 빛나고 있다. 평소 예술에 관심이 지대한 남편의 적극 지지한다는 말에 보상심리까지 더해지니 물욕이 날개를 달았다. "응. 좋은 거 사서 오래 정 붙이고 써야지. 나 진짜 비싸고 좋은 거 지른다. 아싸!"
갑자기 하늘에서 한도 없는 카드라도 떨어진 듯 좋아하는 도자기 브랜드 홈페이지부터 들어간다. 평소 예뻐서 구경하다가도 가격을 보고는 흥미가 뚝 떨어졌던 것들 위주로 살펴보며 그것들이 놓여있는 우리의 식탁을 상상한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몇 군데의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신나는 소꿉놀이에 빠져버렸다. 한참 동안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어차피 모든 물건은 내 손으로 들어오는 순간 짐이 된다는 생각에 결제를 보류하기도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번만큼은 이런저런 생각에 흔들리지 않고 반드시 구매하리라 결심했다. 남편이 설거지를 마치기 전에 최종 후보 몇 가지를 골라낼 것이다.
하지만 곧 결연한 의지보다 강력하고 무거운 눈꺼풀에 인터넷 서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인데 시야를 차단당했다.
다음 날 코로나 때문에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했던 친정 식구들의 방문이 있었다. 외출이 제한되던 때라 가족들이 머무는 동안 집에서 밥을 해 먹었다. 커다란 교자상을 펴고 모여 앉아 복작복작 식사를 했다. 가족이 머물던 2박 3일 동안 반찬이 많기도, 적기도 했지만 밥 먹는 중간에 입맛이 떨어져 수저를 놓는 일은 없었다. 지난밤 그토록 굳건하던 욕망은 온데간데없고 수고와 정성 어쩌고 하던 말들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릇이 부족해 밥이나 국을 받지 못한 사람은 없는지 반찬을 담기에는 충분한지 등의 생각만으로 분주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밥을 먹고 새벽 늦도록 이야기 나누며 오랜만에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냈다.
가족과 짧은 만남을 마치고 다시 둘이 되어 저녁을 먹는데 더 이상 밥상 위의 개성 없는 그릇이 거슬리지 않는다. 다이소의 천 원짜리 그릇에도 이케아의 이천 원짜리 그릇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내게 필요했던 건 명품그릇이 아닌 그저 출산 후 가족의 온기였을 뿐이라는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릇은 그저 그릇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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