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런이유지 Sep 08. 2023

이상하다 월계수잎 통이 안 보이네

가게를 오픈한 이래로 유난히 한가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오늘이 역대 최저매출을 갱신한 날로 기록될 것이다. 모두가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실은 전혀 힘이나 위로가 되어주지 못한다. 여기저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다양한 직군의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봐도 누구 하나 괜찮다 말하는 사람이 없다. 케이크를 만들어내지 못하던 때처럼 다시 빛을 잃은 어둠에 갇힌 기분이다. 시작과 달리 경력이 쌓여 노하우도 생기고 손도 빨라졌는데 일이 줄어드니 마음이 더 힘들다. 엎친데 덮친 격일까. 어제 홀케이크를 찾아간 손님한테 연락이 왔다. 보냉포장을 했더니 보냉재가 녹으며 케이크 상자가 다 젖었고 그로 인해 케이크 모양도 망가져서 못 먹게 됐으니 보상을 해달라고 한다. 보냉재는 보조 역할일 뿐인데 뜨거운 날씨에 밖에 오래도 있었나 보다. 옥신각신하는 게 더 스트레스받아서 전액 환불 처리를 했다. 그 과정에서 남편과 얼굴도 좀 붉혔다. 시작부터 기운이 쭉 빠지는 날이다.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은 없던 20대의 언젠가는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여자들의 ‘부인’스러운 아이템을 동경했다. 털 달린 옷이나 명품 가방을 들고 남편 옆에 서있는,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여유로울 것 같은 NEW부녀. 그 이미지로 나의 미래도 상상했었다. 막상 내 차례가 되니 사치품은 일절 안 사게 된다. 결혼을 핑계 삼아 뭐라도 하나 구매할 수도 있었지만 라이프스타일과 동떨어졌으며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아이템을 사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또한 그것을 사계절 습한 제주에서 잘 보관할 자신이 없었다.


오늘 다 판매하지 못한 케이크들이 쇼케이스에 저렇게나 있는데 또 내일을 위한 케이크를 만들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하다. 오전의 환불 사건이 마음에 불을 지핀다. 이 일 그만할까? 하루라도 빨리 다른 일자리를 찾아봐야 하나? 뭘 새롭게 할 수 있을까? 서울로 가야 하나? 유동인구가 좀 있는 시내로? 정말 그만둔다면 많은 창업대출은 한꺼번에 다 어떻게 하지? 아 정말 모르겠다.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일이 힘들 때면 마음 한구석 눈곱처럼 남아있는 귀부인 아이템에 대한 미련에 쇼핑 목록을 뒤적였는데 이젠 그런 욕구조차도 사라지고 없다.


어영부영 하원시간이 됐고 심야영업이라도 해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지만 빨리 가게를 벗어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을 보니 회색빛 마음에 알록달록 색감이 물든다. 퇴근길에 아이가 좋아하는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도 같이하고 집으로 왔다. 오늘은 특별히 더 맛있는 음식을 가족과 나누고 싶어 어설픈 솜씨로 라구소스를 만들었다. 만들다 보니 고기 듬뿍 소스가 아닌 채소 많이 많이 소스가 됐지만 괜찮다.


월계수잎을 넣으면 좋겠다 싶은데 통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얼마 전에 사용했었는데. 남편에게 냉동실 좀 찾아보라고 했더니 그 길로 냉동실 정리를 1시간 가까이한다. 본인도 마음이 많이 복잡했나 보다. 둘만 있었으면 서로 말없이 나는 소스만 끓이고 남편은 청소만 했을 텐데 신나게 우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아이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역시 내가 만들어준 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두 사람과 함께 정체불명의 붉은 소스 파스타를 나눠먹고 해변으로 나갔다. 바람은 살랑 기온도 적당하고 엄마 아빠랑 산책이 제일 좋은 아이는 음악에 맞춰 신나고 경쾌하게 몸을 흔든다. 나란히 신발을 벗어두고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담가보니 물도 많이 차갑지 않아 딱 좋았다. 폭풍우 치는 마음을 오늘만큼은 완벽한 자연에게 위로받고 있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 오래전부터 있던 카페에도 얼마 전에 오픈한 술집에도 빈 테이블을 마주한 주인이 구석에 앉아 처진 어깨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유난히 쓸쓸한 그 골목을 지나며 발길이 무거웠다. 내일은 우리 모두 좀 나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버텨보기로 한다.


그나저나 정말로 월계수잎 통이 보이지 않는다. 싱크대에도 냉동실에도 없다. 통도 커서 금방 눈에 띌 텐데. 버린 적이 없으니 아마 정리 조금 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테지. 곧 다가올 우리의 희망처럼.


이전 03화 집에서 밥을 먹으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