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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이유지 Sep 10. 2023

해장국 먹으러 갈까?

보통 사람들이 한평생 살면서 먹는 음식의 종류가 300가지를 넘기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친자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어지간한 카더라는 금방 기억에서 지워지지만 그 말은 좀 신박했다. 응?! 300가지도 못 먹어보고 죽는다고? 당시 지금처럼 요식업이 발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던 20대 초반이라 3000도 아닌 고작 300이라는 숫자에 좀 놀랐다. 지구본을 돌리면 볼 수 있는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며 최대한 많은 음식을 먹어봐야 죽을 때 억울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새로운 환경을 두려워하는 탓에 대체로 경험은 부족하고 겪어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선입견이 있는 편이다. 변화를 꺼리는 많은 것들 중 단연 최고는 역시 음식이다. 오늘은 진짜 진짜 기똥차게 맛있고 새로운 음식을 하겠노라 굳은 결심을 해도 마트에 들어서면 익숙한 식재료들만 고르게 된다. 늘 사던 것들 외에는 시야가 블러처리(흐림 효과)로 자동설정되는 것인지 같은 마트에 몇 년째 다니면서도 여기 이런 것도 있었어? 하는 경우도 있다.


내 미각은 더하거나 빼기 없이 딱 정해진 방만 매달고 빙글빙글 같은 자리를 돌고 도는 대관람차를 닮았다. 된장찌개-김치찌개-불고기-제육볶음-미역국-비빔밥-소고기뭇국-나물반찬 기타 등등.. 거기에 더해지는 몇 가지 외식메뉴. 심지어 실패에 대한 타격감이 적은 과자나 음료수에서조차 도전정신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나를 사도 클래식 여러 개를 사도 클래식이다. 식품 표시사항을 잘 살펴보는 편은 아니지만 어쩐지 신메뉴에는 첨가물도 더 많을 것 같다. 마음만은 언제나 요즘 사람이고 싶지만 이런 식으로 입맛이 깨진 바가지 역할을 하며 나이를 증명한다.



결혼하고 얼마 후 마일리지를 선물 받아 대만에 다녀온 적이 있다. 중국과 일본도 후보지였지만 여행은 역시 미식여행이라는 생각에 대만을 선택했다. 공항에 내려 열심히 유명 맛집을 향했다. 메뉴는 바로 곱창국수. 면도 좋아하고 곱창도 좋아하는데 곱창국수라니!! 만든 사람 천재 아냐? 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환상의 길거리 음식이 없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한국에서부터 설레는 마음 고이 안고 도착했다. 길게 늘어선 대기줄이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기대는 컸지만 덩치값을 못하는 위의 크기를 생각해서 작은 사이즈 하나로 나눠 먹기로 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대만의 음식들을 최대한 많이 섭렵할 예정이었으므로. 드디어 곱창국수 컵을 받아 들고 한입 왕 먹었다. 오물오물 냠냠냠.. 어라? 응?? 음… 이게 뭐지?! 분명 내가 좋아하는 면과 곱창을 섞어서 끓인 것인데 이게 뭐람?!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완전히 새로운 향에 흠칫 놀랐다.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특유의 냄새를 느꼈는데 그 냄새가 입으로 호록 들어온 것이다. 첫인상의 강렬함은 후각과 미각의 감각수용기에 고이 새겨졌다. 곱창국수만의 문제인가 했더니 어디를 가도 그 냄새이고 어떤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이었다. 이번여행은 망했다 싶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호텔 조식의 기본메뉴로 나오던 쌀밥, 오믈렛, 김치가 없었다면 나는 어쩌면 세계 최초로 미식여행을 가서 단식하고 돌아온 사람으로 기록 됐을지도 모른다. 오후시간 내내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아침마다 밥과 계란, 김치를 한 접시 가득 담아 폭식하며 남은 여행기간을 채웠다.




요즘 부쩍 해장국을 자주 먹는다. 몇 년 전만 해도 해장국을 파는 식당 앞만 지나도 냄새난다며 숨을 참곤 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1주일에 한 번꼴로 해장국집에 가고 있다. 제육볶음과 돈까스만큼 해장국을 좋아하는 남편은 언제나 오케이다. 기겁하던 선지도 빼지 않고 그대로 뚝배기를 받아 큰 덩어리는 남편에게 건네고 작은 것들은 채소로 살짝 덮어서 먹는다. 청양고추를 된장에 찍어서 함께 먹으면 정말 100점짜리 한 그릇이다.


약간의 빈혈이 있다는 건강검진결과에 미각세포가 좀 너그러워진 것일까? 현기증을 느끼며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이 들어 입맛이 변한 걸까? 왠지 해장국을 마주할 때마다 불혹을 향한 마중물을 들이켜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묘하긴 한데 맛있는 음식이 목록에 하나 더 추가됐으니 일단 환영이다.


아이는 아빠 입맛을 닮았는지 가리는 음식이 없다. 다대기 풀기 전 엄마가 나눠주는 해장국도 잘 먹고, 중국식 만두집에서 독특한 향이 나는 만두도 잘 먹었다. 식성 까다로운 아이라면 일하면서 밥 챙겨주기 정말 어려웠을 텐데 내가 운이 좋은가보다.


한 번 사는 인생 억울하지 않게 최대한 많은 나라를 여행하리라던 스무 살의 패기는 음식 때문에라도 해외는 안 되겠다며 우물 안을 파고드는 개구리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대만여행 이후로 아직까지 해외를 나가보지 않았다. 다시 익숙함에 기대어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만여행 이후로 임신, 출산, 육아라는 큰 변화가 있었고 이젠 해장국도 즐기게 됐으니 다시 한번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한창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한 어린이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이다. 조만간 여권을 갱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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