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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이유지 Sep 30. 2023

완벽한 하루

야근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의 8할은 생크림 상태에 달려있는데 오늘 그 생크림이 아주 작정을 한 것 같다. 덕분에 자정 넘어서까지 홀로 야근을 했다. 불경기와 함께 찾아온 2023년에는 야근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딱히 기억에 남는 억울한 날이 없는 걸 보니 긴 추석연휴를 앞두고 올해의 첫 야근이었나 보다. 오랜만의 야간작업에 새록새록 피어나는 옛 추억이 떠오르기는커녕 이 시간이면 가족들이랑 ~하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일상을 이 희멀건한 것에 빼앗긴 느낌이다. 생크림의 탈을 뒤집어쓴 청개구리의 공격이 시작된 게 분명하다. 때마침 걸려온 남편의 전화. “많이 했어?”,”아니 생크림이 또 말을 안들어어어~~~ 진짜 짜증 나 죽겠어 뭐야 이시끼 정체가 뭐야 도대체 으아~~”


어둠 속 풀벌레 소리만 울려 퍼지는 적막한 동네에 환하게 불을 밝혀두고 혼자만의 싸움을 했다. 뇌피셜을 기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하우를 총출동시켰다. 생크림을 얼음볼에 넣었다가 뺐다가 기계를 썼다가 손으로도 쳐봤다. 휘퍼의 속도도 조절해 보고 젓는 방향도 바꿔봤다. 안된다. '이건 기술 탓이 아니야. 생크림 컨디션 문제가 확실해!!' 오픈 초기였다면 근거 없는 자기 위안 이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재료를 매일같이 다루며 상태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그것을 다루는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른 대처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꼼짝없이 주방에 붙잡혀 있으니 마음이 삐딱선을 타고 질주한다.


연휴를 앞두고 유독 추가 예약문의가 많았다. 예전 같으면 거절했을 텐데 이제는 손도 빨라지고 일 잘하는 직원의 도움을 받고 있기 때문에 추가 예약을 받았다. 어차피 뒷수습은 나의 몫이므로 그러자고 했다. 아이의 하원시간에 맞춰 남편과 중간 작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대충 배를 채우고 설거지도 놔둔 채 저녁 8시가 조금 넘어 가게로 향했다. 머리를 바짝 고쳐 묶고 좋아하는 드라마를 재생시켰다. 이제 열심히 아이싱만 하면 된다. 양이 좀 되기는 하지만 생크림만 잘 따라준다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넉넉히 2시간 예상하고 11시 전엔 집으로 향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자정이 다가오도록 끝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잔뜩 빌려와 쌓아 둔 책도 보고 싶은데.. 이렇게 일만 하다가 하루를 마무리하면 종일 인스턴트 음식으로 배를 채운 것처럼 마음이 공허하다.


대충 정성껏 일을 마무리하고 이틀간 쌓아둔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했다. 웬만하면 피곤해서 외면하고 싶지만 뒤죽박죽 쌓여있는 재활용통을 보고 있자니 꼭 내 상태 같아 기분이 별로다. 저거라도 착착 정리해야 찝찝한 오늘의 마음도 정리될 것 같다. 재활용 쓰레기를 차에 싣고 건물과 말다툼이라도 하고 돌아선 듯 뒤도 안 보고 쓰레기장으로 붕~ 달렸다. 마지막 쓰레기를 버리고 차로 걸어가는데 내 뒤에 이름 모를 노년의 야근동지가 쓰레기를 버리러 왔다. 차에 타려는데 차 안에 있던 운전자가 쓰레기를 버리는 일행을 1초라도 빨리 태우고 싶었는지 내 앞길을 가로막고 섰다. 뭐야 왜 저래.. 얼마나 빨리 가겠다고 저러는 거야! 차가 빠지고 나도 출발했다. 라디오에서는 야근으로 꼬여버린 저녁시간을 좀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려는 듯 베르디의 ‘축배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시골길을 달려 집 앞 편의점 사거리에서 멈췄는데 앞에 차 한 대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어라?! 아까 쓰레기장에서 길 막던 차네. 그렇게 쌩쌩 달려가더니 결국 여기서 만났네? 흥. 신호가 바뀌고 앞 차가 사라져 주길 바랐는데 우리 빌라 주차장으로 향한다. 오 마이 갓. 이 건물에서 가장 마주치기 싫은 아랫집 아저씨다. 밤 11시에 설거지하는 소리 시끄럽다고 신고해 경찰을 대동하고 집으로 쳐들어왔던 사람. 경찰도 황당해서 별 말없이 돌아갔다. 아이 발소리라도 좀 나면 본인 화장실 문을 부술 듯이 발로 차서 감정을 분출하는 사람. 밤낮없이 피워대는 줄담배로 복도에서 화장실에서 베란다에서 담배연기 공격을 시도 때도 없이 해대는 진상. 이런 날 저 진상 노인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니 한강이 된 불어 터진 라면을 김치 없이 먹어야 하는 상황만큼이나 기분이 더럽다. 생크림으로 상한 기분이 바닥이 아니었음을 굳이 확인 시켜주고있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완벽히 엉망진창인 끝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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