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런이유지 Sep 18. 2023

종로에서 만나

마음의 고향

실내공간에 볕이 잘 들어오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주방벽과 얼굴을 맞대고 케이크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다가 우연히 매장으로 시선이 스쳤다. 가운데 자리에서 너댓 명의 여자 손님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순간 그녀들의 공기 속에는 찬란한 햇살이 비추고 내가 서있는 주방은 치지직 흑백영화의 한 장면이 되어 현실이 극적으로 느껴졌다. 아 부럽다. 나도 저 빛나는 환상으로 들어가고 싶다. 친구들 만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못하는 화장도 하고 쑥대밭이 된 방에서 예쁜 옷도 골라 입고 또각또각 외출하고 싶다. 영업에 필요한 과일을 사러 나가는 외출 말고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그런 외출 말고.


20대의 나는 주로 종로에 있었다. 종로에서 알바도 하고 학원도 다니고 데이트도 하고 친구들도 만났다. 종로 2가를 중심으로 시청, 경복궁, 광화문, 명동, 인사동, 삼청동, 대학로, 신촌, 홍대 등을 넘나들며 하릴없이 먹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늘 심각하고 진지했지만 예쁘기만 한 날들이었다.


고향의 정의를 찾아보면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는 세 가지 해설이 나온다. 경기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여덟 살부터 서울에서 자란 나는 고향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가 별로 없다. 참다운 고향의 의미는 자기가 태어났으며 조상 대대로의 친인척 후손들이 아직 그곳에 있고 유년시절의 추억이 듬뿍 깃든 즉, 목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사전적 정의까지 충족되어야 완성될 텐데 나에겐 그 모든 것이 없었다. 태어난 곳에서는 추억이 적고 자란 곳에서는 정서적 친밀감을 쌓지 못했다. 3번의 해설에서 애잔함을 대변하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이라는 부분을 빼면 떠오르는 장소가 바로 종로였던 것이다.


제주에서 놀기만 하던 처음 3년은 이곳의 풍경에 취해 도시에서 익숙했던 모든 것이 그립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생업을 책임지고 일에 자유를 빼앗 길 때쯤 한 번씩 서울에 가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고향이라는 어쩐지 가슴 찡한 의미보다는 살던 곳이라는 표현정도가 어울리는 마음으로 서울을 그리워했다. “나 서울이랑 별로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살던 곳이라고 다시 가고 싶어” 일하던 중간중간 처진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자주 했던 말이다. “내가 애기 보고 있을 테니까 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와”, “아니 그런 거 말고 다시 서울로 가서 살고 싶어” 그렇게 한동안 나만의 방식으로 향수병에 시달렸다. 언제든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의 제주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지만 현실의 벽에 갇혀 못 가는 상황이 되니 이곳이 바로 감옥이었다.


우리의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한 번씩 2박 3일 일정으로 서울에 올라가 인파에 치이고 나면 한동안은 도시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시의 인구 과밀화 문제는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닌데 이 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매번 서울의 인구밀도가 적응이 안 됐다. 자가용을 타면 도로에도 주차장에도 넘쳐나는 차들 때문에 갇힌 느낌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인파에 갇힌 한 줄기 콩나물이 됐다. 과거의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 했던 마음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얼른 볼일보고 집으로 가야지. 사람보다 일에 치이는 쪽이 낫겠어…’


추석연휴를 앞당겨 서울에 다녀올 예정이다. 이번 방문 목적은 우리 중 가장 늦게 결혼하는 친구의 청첩장을 받으러 가는 것이다. 새로 태어난 둘째 조카도 만나고 가족들도 만나겠지만 이번만큼은 친구들과의 만남이 가장 기대된다.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과 옛 추억을 곱씹으며 내가 좋아하는 당면이 잔뜩 들어간 야채곱창을 먹기로 했다. 저녁 약속이라 매장에서 봤던 손님들처럼 찬란한 햇살은 없겠지만 도시의 화려한 불빛아래 모여 세상에 우리밖에 없는 듯 웃고 떠들다가 올 것이다. 오랜만에 스무 살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온 방안을 헤집으며 옷도 골라뒀다. 친구들과 나란히 서서 또각또각 대학로를 거닐 생각에 설레어 커다란 여행가방에 짐도 잔뜩 담았다. 아이는 새로 태어난 동생 앞에서의 양치질이 가장 기대되는지 며칠 전부터 무당벌레 여행가방을 꺼내 가장 좋아하는 칫솔 5개, 양치컵, 칫솔꽂이 등을 일찌감치 넣어뒀다. 이번에도 도로에 갇히거나 인파에 갇히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기대된다 우리의 환상은 어떤 모습일지.

이전 17화 완벽한 하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