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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돌이 나름 선생님 Oct 26. 2022

수프에서 자는 여자

수프의 온도는 미지근했다. 그녀가 내게 수프 침대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을 때 마음 한편 어딘가에서는 찜찜했다. 나는 좌욕하는 자세로 종아리 반쯤까지만 수프 침대 속으로 넣었다. 물에 발을 담근 느낌과는 확실히 달랐다. 살갗으로 수프 가루들의 균질하지 않은 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손 위로 턱을 괴고서 수프 침대에 누워있는 사랑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이름은 이사랑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알맞은 곳에 가장 알맞은 포즈로 있다는 듯이 더할 나위 없이 편해 보였다. 

 처음엔 붕어 한 마리가 내 종아리에 작은 지느러미를 스치고 지나간 줄 알았다. 나는 깜짝 놀라며 발을 빼냈다. 수프가 바닥으로 튀었다. 점액성이 떨어지는 물이었다면 더 많이 튀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이런 겁 많은 모습을 보인 것을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다. 분명 사랑이 발을 들어 내게 장난을 친 것일 텐데. 

나는 슬며시 발을 다시 수프 침대에 넣으려 했다. 헌데 그때 난 보았다. 수프에서 실제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을. 그것의 생김새는 머리와 몸체, 다리와 구분된 여느 생물과는 달랐다. 그것은 떡볶이를 닮아있었다. 나는 그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몸은 새하얗고 털도 없고 딱딱한 껍질도 날카로운 뿔도 이빨도 없었다. 내 몸 어딘가 구멍으로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나를 해칠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수프가 따뜻하고 영양분이 있다 보니 신종의 벌레나 아니면 기생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억지로라도 발을 넣으려 했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 그녀와 첫날밤을 보낼 작정이기 때문이다. 난 오늘 사랑의 집에 처음 온 것이고,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지도 몰랐다. 다시 발을 넣을 때, 내 온 몸을 수십 개의 떡볶이 벌레가 훑고 지나갔다. 이사랑은 거의 반쯤 졸린 표정을 한 채 평화롭게 누워있었다. 


사랑은 수프 속에 몇 시간이나 있었다. 하긴 그곳은 그녀의 침대이니까 오히려 몇 시간이면 잠을 적게 잔 것이었다. 사랑의 온 몸에서 수프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끈적끈적한 수프가 떨어질 때 시간은 느리게 갔다. 나는 그녀의 알몸보다 여전히 그녀 몸 위를 기어 다니고 있는 벌레들이 더 신경 쓰였다. 

 사랑은 내가 자꾸 흘긋대자 겸연쩍은 듯 웃으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녀의 손바닥에 무스 한 움큼을 뿌리 듯 수프가 한 가득 묻었다. 잠시 뒤 사랑은 화장대에 앉더니 몇 개의 화장품 뚜껑을 열었다. 손가락에 화장품을 묻히기 시작하더니 사랑은 화장을 시작했다. 나는 수프가 잔뜩 묻은 얼굴에 다시 화장품을 펴 바르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급기야 뭉툭한 그 하얀 벌레는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한 마리, 두 마리. 나는 그녀가 왜 화장을 하면서 입을 벌리고 있는지 안타까웠다. 헌데 그녀는 분명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수프를 좋아하는 그녀는 수프에 사는 벌레까지 좋아져버린 것일까. 

 화장을 끝낸 그녀는 속옷까지 입기 시작했다. 속옷은 끈적한 수프에 축 늘어졌고 붉은 립스틱을 칠한 입술에도 아직 수프의 잔액이 남아있었다. 사랑은 머리카락까지 빗더니 바깥 날씨가 선선하니 잠시 산책하고 다시 들어오자고 했다. 그리고 와인과 치즈도 사오고. 그녀가 오늘밤 나를 거부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온몸에서 수프와 수프 벌레가 흐르는 그녀를 보니, 내 마음은 어쩐지 수프보다는 조금 다 차가워졌다. 오늘 사랑은 나를 집에 데려오며 말하길,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볼 수도 있다고 했다. 혹시 그녀는 이걸 말한 것일까.

 사랑은 내게 외투를 좀 꺼내 달라고 했다. 나는 설마 그녀가 수프가 흐르는 몸 위로 겉옷과 외투까지 입을 줄은 몰랐다. 그녀가 문을 열자 벌레들은 우르르 그녀 발꿈치 쪽으로 몰려들었다. 욕지기가 조금 일었다. 그녀가 문을 닫기 직전에 나는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나는 아파트의 베란다 쪽으로 가 아래를 쳐다보았다. 8층 높이였다. 나는 아무래도 수프 침대를 쓰는 여자와는 같이 못 살 것 같았다. 나는 8층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바닥에 부딪힌 뒤에도 내 몸은 괜찮았다. 내 몸은 떡볶이처럼 작아졌고 탄력 있어졌다. 다만 꿈틀꿈틀 기어 다녀야 했다. 그녀가 보기 싫어 죽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녀 몸 위를 기어 다니던 그 벌레들이 부러워졌다. 며칠 동안 몇 명의 아이들이 내 몸을 밝고 경비원 아저씨는 나를 쓰레받기에 담아 휴지통에 버리기도 했다. 나는 하루 종일 기어 쓰레기통으로 밖으로 나왔고, 지금은 8층을 향해 기어가고 있다. 내일 밤쯤이면 5층 정도에, 모레 아침은 되어야 8층에 이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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