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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캣 Jun 08. 2024

책 속 한 문장 - 4

에세이『귀를 기울여 나를 듣는다』

세 번째 명상 수업은 ‘업장’ 또는 ‘페인바디’라고 불리는 ‘고통체’였다. 고통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격이 된 고통을 뜻한다. 


(중략)


해소되지 않은 고통은 기억이 사라져도 마음 깊은 곳에 침전물을 남긴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고통체로 인해 감정적인 폭력이 시달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고 그 과정에서 대를 이어 고통체가 전해진다. 고통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부피를 늘려간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도 고통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 존재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젊은 시절에는 고통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통체는 견고해지고 나서야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중략)


고통은 갈망과 혐오를 오가는 것이라고 한다. 무언가 간절하게 원했다가 가질 수 없어서 좌절하고 그로 인해 혐오를 느끼고 다시 또 가지려고 발버둥 치다가 눈앞에서 놓쳐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고통이었다. 


(중략)


고통체는 고통을 먹으며 성장한다. 고통체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은 오래된 고통에 새로운 고통을 더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체는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드라마, 미디어의 자극적인 뉴스와 존재를 드러내려는 욕구를 좋아한다. 타인을 대할 때도 상대에게 느껴지는 인상, 특히 싫고 괴로운 부분에 파고들어 고통으로 연결한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면 이번에는 상념만으로 괴로운 감정을 자아낸다. 고통체는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된다. 고통체에 사로잡힌 사람은 고통을 자신이라고 여기며 또 다른 고통을 찾아다닌다.




『귀를 기울여 나를 듣는다』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솔직히 글을 쓰고 출간하기까지 나름의 결심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마주할 순 없어도, 적어도 내가 느끼는 고통의 정체만큼은 밝혀내고 싶었다고 할까요. 아마 제가 쓸 수 있었던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저도 고통과 상처를 멀리하고 희망과 기쁨을 가깝게 두고 싶습니다.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어두운 이야기는 포유류의 직감을 발휘해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죠. 


순수한 독자의 입장에서 저는 에세이를 잘 읽지 않습니다. 글에서 드러나는 누군가의 인간적인 면모가 항상 자신을 떠올리게 하니까요. 그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험적인 픽션에 끌립니다. 소설은 현실의 탈출구라는 점에서 항상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늘 ‘하지만’이 문제입니다) 나쁜 것은 흘려보내고 좋은 것만 남겨두고 싶지만 납득되지 않는 나쁜 것은 그대로 흘러가지 않고 반드시 마음에 남습니다. 이런 침전물이 인격을 가지게 되면 바로 고통체(페인바디)가 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나를 붙잡고 있는 족쇄, 이를테면 개선될 수 없는 결함 같은 것은 항상 내 발목을 붙잡고 내가 간신히 쌓은 수고를 번번이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나 자신’은 외면하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결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싫어도 문제투성이인 나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 수단으로 저는 명상을 선택했지만 딱히 명상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을 겁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나 자신까지도 타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성’이라는 어느 수필 문장이 떠오릅니다. 글을 정말 잘 썼던 작가였는데 지금은 에세이 제목도 작가 이름도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세이를 출간한 작가 중에는 본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번역가라던가, 편집자라던가 글쓰기를 가까이하다가 책을 출간하는 경우가 흔하죠. 저 역시 편집디자이너로 일하다가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업계에서 일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출판에 대한 허들이 높지 않았습니다. 


그 작가도 본업이 따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꽤 유명한 블로거였는데, 책이 나왔을 때 역시 출간되었구나, 싶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에세이 한 권을 쓰고는 더는 글을 쓰지 않았는데 그처럼 글을 잘 쓰는 에세이 작가가 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일찍이 등단한 시인이나 소설가를 제외하고요) 좀 더 관심을 기울여 덕질할 걸 그랬습니다. 

 

그때 첫 책을 출간했을 즈음인데 나 자신에 대한 의문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겠죠.) 나 자신을 알고 싶다, 스스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질문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값을 치룰 대가가 필요한데 그때는 책이 그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타고난 독서가가 아니기 때문에 책만으로는 부족했지만 독서가 명상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무엇이든 깊은 집중의 단계로 접어들면 결국 그곳에서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통이 인격이 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유쾌하진 않지만 자신과 마주하는 것, 그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네요. 마주하고 흘려보내고 또 마주하고 흘려보냅니다. 책에 쓴 그대로 마음이라는 방을 청소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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