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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Jan 10. 2021

삶의 부피에 대하여

삶 #5. 모순 - 양귀자

 왜 사냐고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답할 것이다.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거창한 기쁨이든 주말 오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보내는 시간의 소소한 행복(이 시국 전에는 너무나 사소하고 당연했던)이든 인간은 반드시 행복을 갈구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다.'


내 이름은 안진진... 하지만 아버지도 진진이란 이름 앞에 '안'이 붙는다는 사실까지는 유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간 지나치게 해석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도 나라는 인간은 평생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인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모순을 다 읽은 당신이라면, 엄마와 이모 중 누구의 삶을 선택하겠는가?


이모의 행복하면서도 불행했던 삶.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가정은 부유하고 화목했으며 자식들은 잘 자랐다. 그렇게 이모는 무덤 속 같은 평온한 삶을 살았다.


반면 쌍둥이 언니인 엄마는 불행하면서도 행복했던 삶을 살았다. 아버지의 가출과 폭력, 경제적 무능, 조폭 흉내를 내는 문제아가 되어 매번 사고를 치다 못해 감옥까지 간 동생 진모까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항상 특유의 과장법으로 극복해냈던, 항상 활력이 넘쳤던 어머니의 삶이다.


이모가 자신의 엄마라고 거짓말을 할 정도로 안진진의 엄마는 억세고 촌스러운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엔 안진진이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가장 멋있는 인물은 엄마였다. 엄마는 불행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단단하게 쌓아가는 사람이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삶 역시 양면적인 것이다. 어머니는 제정신이 아닌 아버지와, 수감 중인 자식을 챙기며 삶의 부피를 채워나갔다. 하나만으로도 벅찰 불행을 수없이 마주하면서도 오히려 활력이 넘치게 살아간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였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불행을 짊어지고 고민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내 삶만 힘들고 다른 사람의 삶은 편하고 부러워 보이더라도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무런 불행이나 결핍 없이 평탄하게 살아가는 삶보다는 간혹 슬픈 일도 있고 결핍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부피감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다.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스스로 견딜 수 있는 시련과 고통만을 겪기를 바란다고. 그는 어째서 행복이 아닌 시련이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했을까?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어느 정도의 불행도 필수적이며,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앞에 쓴 글에서 좋은 이야기를 쓰며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세상에 정해진 목적이나 진리를 쥐고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빈 곳을 내 스스로 채우고 의미 부여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현상을 마주했을 때 이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내 삶이 규정되는 것이라고 썼다.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삶을 해석할 수 있는 재료는 경험에서 오며, 그 재료에는 불행만이 있어 너무 맵고 짜서도 안 되겠지만 행복만이 있어 너무 달기만 해도 쉽게 물리고 무료할 것이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안진진은 왜 나영규를 선택했을까? 무능한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그래서 나 안진진의 안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김장우. 건실하지만 그래서 지루한, 절대 연착 없이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기차와 같은 이모부를 떠올리게 하는 나영규. 후반부로 갈수록 당연히 김장우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유 하나는 로맨스조차 하나하나 계획대로 착착 진행하는 나영규가 참 별로라고 느꼈기 때문이었고, 둘은 지리멸렬함을 견디지 못한 이모가 목숨까지 끊었으니 당연히 안진진의 선택은 김장우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가 부유하고 평탄한 이모의 삶을 부러워하고 이모가 활력이 넘치고 풍성한 어머니의 삶을 부러워했듯이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결국, 답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영규냐 김장우냐, 엄마냐 이모냐라는 삶의 질문에서 김장우도 이모도 답은 결국 아니었지만, 김장우를 선택한 안진진이, 또는 이모부를 선택한 이모가 행복했을지 여부는 사전적으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살아보고 나서야 지나온 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삶이다.


이십몇 년 전, 당신이 참 진자를 두 개씩이나 넣어 이름을 지어준 나. 그러나 운명적으로 '안'이라는 부정의 성을 물려주어 안진진으로 만들어버린 나.


주인공 안진진의 이름 자체가 인간과 삶의 본질적인 모순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도 나를 모르는. 아무리 진실되게 처절하게 탐구하며 살아도 답을 알 수 없는, 그것이 인간이고, 삶이다. 그래서 오히려 삶에 대한 용기를 얻는다. 아무리 탐구하여도 답을 알 수 없는 것이 삶이라면, 그렇다면 달리 말해 삶에 있어 내가 선택하는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살아라. 충실하게 실수하며 살아가라.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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