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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인호 Oct 18. 2017

타짜 디자이너가 오래 살아남는다.

Part3. 1인 디자인 기업으로 10년 먹고살기-2

디자인에는 여러 분야가 있고 담당하는 업무도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광고디자이너라면 한 광고주의 광고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광고주의 광고를 순차적으로 디자인한다. 디자인 에이전시도 그런 형식으로 운영되는데 클라이언트의 직종에 따라 디자인의 성격도, 방향도 바뀐다. 이렇게 프로젝트 별로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이 디자이너의 매력 중 하나라고 본다.


하지만 디자인의 유형이 아닌 한 산업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방법도 있다. 이것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전문 디자이너라고 칭하기로 했다. 나는 한 산업분야의 전문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오래가는 디자이너의 조건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번 이야기는 교통시스템 분야의 전문 디자이너가 된 나의 이야기이다.




타짜가 되어라.


허영만 작가의 타짜라는 만화를 본 적 있을 것이다. 최동훈 감독의 영화 타짜보다 솔직히 더 재밌다. 화투를 바꿔치기하고, 숨기고, 밑장을 빼는 등 타짜는 화투에 있어서 최고 전문가이다. 디자인에 있어서 타짜들은 무수히 많다. 내가 일하던 프레젠테이션 분야에도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닌데 새로운 스타일을 구사하며 시장을 휩쓰는 타짜들이 있었다. 광고판에도 타짜라 불리는 멋진 아트디렉터들이 있으며, UX 디자이너 중에도 정말 멋있는 작업물을 쏟아내는 타짜 디자이너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사짜 들어가는 전문직이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다. 의사, 변호사, 검사 등... 그런데 그들은 모든 분야에서 타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의사도 자신이 전문적으로 진료하는 전문분야가 있고, 변호사도 세법이나 형법 등 전문적으로 일을 수주받는 전문 분야가 있다.


그런데 왜 디자이너들은 광고디자이너, 패키지 디자이너, 영상 디자이너 등 전문분야가 아닌 유형을 전문분야라고 표현할까? 디자인 업무에도 전문 업무가 있어서 전문 디자이너가 되면 여러 분야의 디자인을 할 때보다 입소문의 파워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나는 전문 디자이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문 디자이너가 되었다. 지능형 교통시스템(ITS)이나 버스정보시스템(BIS) 등 교통시스템을 홍보하는 디자인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한다. 교통시스템을 한 가지 디자인으로 제작하는 것은 아니고 고객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산출물을 디자인한다. 실사 영상을 촬영해 홍보영상을 만들기도 하고,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모션 인포그래픽을 디자인하기도 한다. 아울러 시스템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디자인하기도 하고 리플릿이나 브로슈어를 만들기도 한다. 특이한 제작물로는 금속으로 된 현판을 제작한 적도 있었고, QR코드에 디자인을 입혀 해당 시스템을 홍보하는 웹사이트와 연동시키기도 했다.


지자체 버스정보시스템 홍보 모션인포그래픽 (2016)


이처럼 한 분야의 전문 디자이너가 되면 수주받는 일의 범위가 넓어진다.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가 하는 업무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고 있지 않. 그래서 영상을 의뢰한 디자이너에게 인쇄물도 의뢰하고 프레젠테이션 디자인도 의뢰한다. 나는 일을 가리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교통시스템과 관련된 모든 디자인 업무는 일단 나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업무가 가능하다는 것을 클라이언트에게 알렸다. 일을 수주받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을 구분하고 함께 해야 하는 일들은 다른 디자이너들과 협업해 처리한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는 디자이너는 아니었다. 처음 1인 디자인 기업으로 독립한 후 프레젠테이션 디자이너로 4년 정도를 일했던 때였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프레젠테이션이나 제안서 등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였다. 제안서 디자인을 함께 했던 클라이언트로부터 의뢰 전화를 받았다.


'실장님 홍보영상도 하시죠?'


못한다고 해야 정상이지만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클라이언트의 목소리가 굉장히 다급했기에 일단 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전까지는 홍보영상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도 몰랐다. 얼떨결에 홍보영상이라는 것을 제작하기 위한 미팅 약속을 잡고, 부랴부랴 홍보영상에 대해 공부를 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촬영 현장 경험도 없었고, 영상 편집을 프로페셔널하게 할 수 있는 기술력도 없었다.

전에 영상제작업체와 함께 프로젝트를 공동 수주했던 적이 있어서(그때는 프레젠테이션 디자인 업무였다.) 그 업체 대표님께 전화를 걸어 SOS를 외쳤다.


그 회사와 함께 일하기로 하고 시나리오 미팅부터 촬영, 편집 등 영상제작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계속 따라다니며 어깨너머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홍보영상이라는 업무를 수주받아 납품했다. 물론 외주 PD가 거의 대부분의 일을 다했기 때문에 내 수익은 거의 없었지만 수익보다 훨씬 큰 경험을 얻었다. 그때 수주했던 홍보영상 프로젝트가 교통시스템을 홍보하는 프로젝트였다. 홍보영상도 처음이었지만 교통시스템이라는 것도 처음 접해봐서 적잖이 헤맸다. 클라이언트가 답답했는지 하루 날을 잡아서 과외를 시켜줬다. 각 교통시스템의 의미와 기능, 장비명, 프로세스 등 교통시스템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이후에도 이해가 안 가는 내용들은 직접 자료를 찾아가며 각 시스템에 대해 정말 '힘들게' 공부했다.


그 이후 교통시스템 홍보 프로젝트를 한번 더 맡게 되었는데, 그때는 내가 직접 PD가 되어 프로젝트에 임했다. 기획 미팅을 할 때 내가 교통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클라이언트는 홍보영상 외에도 브로슈어와 리플릿도 추가로 의뢰했다. 카메라나 지미집 등 장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업무는 촬영감독과 협업했고, 성우 및 배경음악, 음향효과 등은 녹음실의 녹음 디렉터와 협업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내가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을 조금씩 늘려갔고, 가장 효율적으로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시스템을 확립하고 나서는 말 그대로 교통시스템 홍보분야의 전문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리고 2017년 현재 8년째 국가 및 지자체의 교통시스템 홍보물 제작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전문 디자이너의 장점


한 분야의 전문 디자이너가 되면 어떤 것이 좋을까?


첫 번째, 다양한 디자인을 마음껏 할 수 있다.

위에서 열거했듯이 나는 교통시스템을 홍보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의뢰받아 진행하고 있다. 단순히 리플릿, 브로슈어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확립해 시각디자인 전반의 디자인을 진행한다. 이것은 한 가지 유형의 디자인을 수년간 반복하며 생길 수 있는 매너리즘이나 피로감 극복에 큰 도움이 된다. 매번 같은 영상, 매번 같은 인쇄물이 아닌, 이번에 영상을 제작하면 다음번엔 리플릿이나 브로슈어를 제작하며 같은 분야의 업무를 하더라도 한 번씩 리프레쉬됨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디자인을 하게 되면 한 가지 더 좋은 점이 생기는데, 한 유형의 디자인을 할 때보다 다양한 수익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업의 지속성에 도움을 준다.


두 번째, 희소성 있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필드에서 알게 된 디자이너 중 한 명은 발전소 전문 디자이너이다. 그 디자이너도 처음엔 단순 도면 작업(설계)부터 시작했는데, 발전소의 설계를 거듭해가면서 나름의 설계 패턴이 생겼고 이제는 국내외 유수의 플랜트 시공사와 협업하는 유일무이한 발전소 전문 디자이너가 되었다. 업무도 처음에는 의뢰받은 도면의 3D조감도 작업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도면 업무, 제안업무, 시뮬레이션 영상업무 등 발전소 개발의 제안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무를 맡아 처리한다. 희소성 있는 디자이너가 되면 일단 몸값이 뛴다. 인건비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 디자이너가 책정한 몸값이 시장단가가 되는 것이다. 발전소 디자이너의 연간 소득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나처럼 교통시스템 홍보물의 제작을 하고 있는 디자이너도 필드에 분명히 있을 것이고, 새롭게 진입하려는 디자이너도 있을 것이다. 또한 교통시스템을 서비스하는 회사에서 일하던 디자이너들도 이 분야로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전문 디자이너로써 꾸준히 쌓아온 경력과 실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사업을 더욱 탄탄하게 만들고 있다.


세 번째, 신뢰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도전이 가능하다.

프로젝트를 의뢰할 때 클라이언트의 주문은 단순하다. 홍보영상 1식, 리플릿 0000부, 브로슈어 0000부 이렇게.

홍보영상을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고 인쇄물의 판형과 페이지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할지, 콘셉트를 어떻게 정할지에 대한 고민은 오롯이 내 몫이다. 각 시스템의 특성과 디자인 트렌드에 맞춰 다양한 영상 제작방식을 제안하고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기도 한다. 처음 홍보영상을 제작해 본 이후 3년 동안은 실사 촬영을 이용한 영상만 제작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고 나서는 내가 자신 있던 디자인이었던 프레젠테이션 디자인을 영상에 접목해 멀티 프레젠테이션으로 제작을 해보기도 했고, 일러스트를 그려서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실사 촬영 영상도 일반적인 홍보영상은 물론, VJ특공대 형식의 체험 영상도 만들어보았다. 최근에는 인프그래픽을 도입해 모션 인포그래픽으로도 제작한다.


Full 3D로 제작한 지자체 버스정류장 안내단말기 매뉴얼영상 (2013)


해당 분야의 전문가적인 식견과 디자이너로서의 감성을 클라이언트가 신뢰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제안을 할 수 있게 되고, 단순히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디자인이 아닌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잘하는 시대는 지났다. 단순히 아름답고 예쁜 디자인만 하는 디자이너보다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만큼이나 해당분야에 대해 잘 알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가 좀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아울러 전문 디자이너는 1인 디자인 기업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인 디자인 기업으로서는 굉장히 힘든 길일 것이다. 디자인 에이전시가 아닌 일반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면 속해있는 산업분야의 전문 디자이너로써 다양한 프로젝트의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편집디자이너로 입사했다 하더라도 다른 디자이너들의 업무를 수시로 지켜보며 간접경험을 할 수도 있다. 단순 디자이너가 아닌 아트디렉터의 역량을 키우는 것. 이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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