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세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를 데리고 간 것이 6.25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난 13살, 10살, 6살 차이 나는 언니 오빠들 사이에 늦둥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늦둥이인 나를 아버지가 너무 이뻐해 무릎에서 내려놓질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뻐하던 나를 두고 아버지는 사라졌다.
전쟁에서 밀리던 우리 군이 다시 북쪽으로 전진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나 우리 마을에는 아직 도망가지 못한 적군이 남아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이 마을에 있는 남자들을 한 곳에 모았다. 어머니는 느낌이 좋지 않다며 나간다는 아버지를 말렸다. 아버지는 머리를 말끔하게 빗고, 하얀 도포를 걸치며 사람이 하는 일인데 별 일 있겠냐며 우리를 안심시킨 후 그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순기야, 아버지 금방 갔다 올 테니 엄마랑 잘 있어라."
그게 마지막이었다. 사실 난 아버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10살 차이 나는 언니가 아버지의 마지막을 기억해 내게 해준 이야기를 내 기억인양 가지고 있다. 그렇게 집을 나간 아버지는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같이 따라나섰던 옆집 아저씨는 계속 산속으로 들어가는 게 이상해 중간에 목숨 걸고 도망쳤다고 했다. 그러나 착하기만 한 우리 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며칠 뒤 산속에 총에 맞은 시체더미가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 올라가 피가 흥건한 시체더미 속을 뒤졌다. 그러나 많은 시체 속에서 아버지를 찾지 못했다. 그 후 수십 년간 아버지는 실종자였다. 사망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실종자.
3살부터 아버지 없이 어머니 손에 자란 나는 아버지,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옆집 친구가 매일 아버지한테 혼나는 걸 보면서 아버지가 없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늘 내 편이고, 나를 이쁘다 해주는 어머니, 친구들과 밤새 놀라며 고구마를 삶아 주는 어머니가 있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우리 집은 그런 어머니 덕분에 동네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오빠들이 일찍 취직해 부산으로 가고, 언니도 일찍 시집가서 나는 10살도 되기 전부터 어머니와 둘만 살았다. 어머니는 내가 원하는 것을(기껏해야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노는 것이었지만) 웬만하면 다 들어주었고, 또 내게 많은 걸 의지했다. 어쩌면 혼자 살았을 긴 세월에 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했다.
어머니만으로 아쉬움 없이 자란 난 남자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아니 남자가 두렵고 싫었다. 국민학교 때 나를 응큼하게 쳐다보던 남자 선생님의 눈빛과 이웃 마을 언니가 어떤 남자한테 몹쓸 짓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남자가더 싫었다. 스무 살이 넘으면서 여기저기 맞선 자리가들어왔지만, 매번 거절했다. 수를 놓고, 양장 기술을 배워 예쁜 옷을 만들어 입으며 사는게 좋았다. 일찍부터 돈을 번 오빠들 덕분에 친구들은 꿈도 못 꾸는 짧은 소매 옷과 미니스커트,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마음껏 입었고, 꽃신, 운동화 등 최신 유행 신발도 원 없이 신었다. 키도 국민학교 6학년 때 160cm가 될 정도로 커 마을 사람들이 미스코리아 한 번 나가보라 권할 만큼 나는 좀 이뻤다.
그렇게 고향에서 지내다 심심하면 부산 큰오빠 집으로 내려와 큰 언니가 운영하는 참기름 가게 일을 도왔다. 어느 날 참기름을 사러 온 아주머니 한 분이 계속 나를 보며 웃더니 물었다.
"아가씨 참 참하게 생겼네. 손도 우째 이래 이쁘노. 아가씨 지금 몇 살이고?"
"저요? 스물다섯 살인데요."
"아이구, 시집갈 때가 넘었네."
다음날은 다른 아주머니 한분과 함께 와서 또 참기름 한 병을 달라했다.
"진짜 곱네. "
그렇게 두 분이 왔다간 후 큰 언니가 맞선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이미 며칠 전 큰 오빠 소개로 선을 봤었다. 서울 사람으로 인물도 훤칠하고 착해 보여 살짝 마음에 두고 있었던지라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그래도 저렇게 사정하는데 한 번만 만나보고 와요."
큰 언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두 번째 선을 봤다. 어색하게 다방에 들어갔더니 전에 참기름을 사러 온 아주머니와 키 작고, 단단해 보이는 못생긴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는 인사를 한 후 서로 이야기 나누라며 자리를 피했다. 며칠 전 선을 안 봤으면 모를까 잘생긴 서울 남자와 선을 본 탓에 앞에 앉은 남자가 더 못생겨 보였다.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와 큰 언니에게 못생겨서 싫다고 했다. 그런데 큰 언니는 남자는 인물 좋으면 인물 값 한다고 인물 말고 사람을 보고 판단하라고 했다.
잘생긴 서울 남자와 못생긴 부산 남자. 졸지에 팔자에 없었던 남자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살면서 아버지, 어머니의 남편을 봤다면 나름의 기준이 있었을 텐데 아버지가 없었던 나는 남자 보는 눈이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난 못생긴 부산 남자를 골랐다. 이유는 딱 하나.
'저렇게 못생겼으니 바람은 안 피우고 나한테 잘하겠지.'
그 이유로 난 원수 같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선을 본 후 참기름 사러 온 아주머니(지금의 시어머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결혼이 서둘러졌다. 1973.2.25. 우리는 결혼하고 경주로 신혼여행을 갔다. 당시 경주 최고의 호텔인 다보탑 호텔에서 어색한 첫날밤을 보내고 2박 3일 동안 경주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은 남자와 몸을 비비고 손을 잡는 게 어색했지만, 부부는 다 그런 거라 생각하며 말없이 같이 다녔다.
여행 중 비싼 숙박비는 남편이 낼 거라는 생각에 밥 값은 내가 계산했다. 그런데 호텔에서 나오는 날 남편은 계산대 앞에서 지갑이 없다며 당황해했다. 어쩔 수 없이 신혼여행 호텔비도 내가 계산했다. 부부니깐...
그런데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며칠 뒤 시어머니가 말했다.
"아이구, 너거는 밥도 안 사 먹고 신혼여행 가서 우째 있었노? 아가 돈을 하나도 안 썼다면서 다 가지고 왔던데?"
'이 인간! 결혼했는데 지 돈이 아까워 내 돈 다 쓰고, 남긴 돈을 엄마한테 줬구나'
그때남편이 가족보다 자기가 우선인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평생 가족을 위해 돈 쓰는 걸 아까워했다.
못생겨서 절대 바람피우지 않을 거라 믿었던 남편은 생각지도 못한 입담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는 어떤 이야기도 잘 이끌며 웃기는 매력, 남들에게만 보이는 그 매력 때문에 평생 여자들이 따라다녔다.(물론 남편 말이다.) 바람을 피우면 들키지나 말지 누가 봐도 나 바람 놨소를 얼굴에 적어 놓고 다닐 만큼 표가 났다. 어떤 일이든 하나밖에 하지 못하는 단순한 남편은 다른 사람이 마음에 있으면 나와 집에는 더 관심이 없었다.
"이놈의 집구석 들어와 봤자 어디 하나 맘 둘 곳도 없고..."
"에잇 이놈의 여편네, 집에 들어오면 잔소리나 하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가족에게 불만과 불평을 쏟아내며 화를 냈다. 그 시절 여느 남자들처럼 폭력과 욕은 일상이었다. 수십 번 이혼하고 싶었지만, 세 아이를 데리고 나가 밥 먹고 살 자신이 없었다. 우리 부부가 싸울 때마다 아이들은 울면서 말했다.
"엄마 그냥 우리끼리 나가서 아빠 없는데서 살자."
그러나 능력 없는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면 굶어 죽는 일 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의 병이 생겼다. 우울증과 심장이 조여 오는 불안감 때문인지 심장판막증 진단을 받았다. 결국 그것 때문에 51살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한쪽 수족을 잃었다.
그렇게 내 평생을 슬프고 힘들게 한 원수 같은 남편이 내가 쓰러졌다고 울고 있으니 기가 찬다.
내가 이렇게 살게 된 이유는 남자 보는 눈이 없었던 내 탓이었다. 아니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보면 내 미모 때문이었다. 왜 예쁘게 태어나서 그 아주머니 눈에 뜨였을까?
엄마에 대한 글쓰기를 한다고 했을 때 아빠는 불안해했다.
"설마 내 이야기도 적나? 그런 건 적지 마라. 젊을 때 잠시 그랬고 지금은 얼마나 잘하노? 지금 잘하는 거 그런 거 적어라. 그리고 내가 그런 게 아니라니깐, 그 여자들이 다 달라붙어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