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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아현 May 01. 2024

5. 둘째 딸의 결혼식

모두가 울었다

내가 쓰러지기 한 달 전, 둘째 딸은 출산했다.  

내가 쓰러지고 두 달 뒤, 둘째 딸은 결혼했다.



둘째는 큰 키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 때 수영선수로 발탁되어 학교에서 ABCD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세상 속에 던져졌다. 당시 운동하는 아이들에게 학교는 타이틀에 불과했고, 그저 학교, 지역, 국가의 대표가 되기 위해 끝없는 훈련 속에 내몰렸다.

새벽에 일어나 체력단련 훈련을 시작으로 낮에는 쉼 없이 수영장 레일을 돌고, 저녁엔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녹초가 되어 들어오는 딸을 보면 운동을 그만시켜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걸고 오는 딸을 보면 고민의 시간들을 잊어버렸다.  


둘째 딸은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한 탓에 날씬한 몸매에 키가 크고, 인물도 좋았다. 어디를 가도 딸 이쁘다는 소리를 들으니,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실상은 얼굴을 제외하고는 성한 곳이 없었다. 당시 악랄하기로 유명했던 수영 코치는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물 묻은 수영복을 입은 아이들의 몸을 각목으로 때렸다. 가끔은 피와 수영복이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는 매일 피멍으로 얼룩진 아이의 몸에 연고를 발라주며 눈물을 삼켰다.  


둘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실업팀으로 들어갔다. 딸은 더 이상 운동하기를 싫어했지만, 그동안 애쓴 시간과 실업팀에서 나오는 적지 않은 월급 때문에 쉽게 그만두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아무도 몰래 운동을 그만두고 집을 나가버렸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와 남편은 딸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다녔다.


한 달 뒤 타지에서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딸을 찾았다. 집에 가자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다신 운동하싶지 않다며, 혼자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버텼다. 나는 딸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모진 고생을 한 딸임을 알기에 이제는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잘할 거라 믿었다.

남편은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그동안 우리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돈과 노력을 투자했는지 이야기하며 화를 냈다. 그러나 딸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결국 남편도 포기했다.


이후 둘째 딸은 타지에서 혼자 살며 가끔 전화로 안부만 전했다. 그런데 딸이 임신했다. 타지에서 만난 착하고 잘해주는 나이 많은 오빠에게 온 마음을 줘 버린 것이다. 남편은 집안 망신이라며 고함을 질렀고, 딸은 울면서 잘 살겠다고 빌었다. 나는 이 모든 게 다 내 죄 같았다. 그때 딸이 운동하기 힘들어할 때 그만두게 했다면, 아니 처음부터 운동을 시키지 않았다면 지금쯤 대학생이 되었을 딸을 생각하니 불쌍하고 미안했다.  


딸은 결혼하겠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딸의 결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임신으로 배가 부른 상태라 아이를 낳고, 세 달 후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딸이 아이를 낳았다. 나는 빨래방을 운영하며 몸이 부서질 듯 힘들었지만,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딸을 위해 내 몸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늘 새 밥에 미역국을 끓이고,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갖가지 반찬을 해서 먹였다. 그리고 밤에는 딸이 편히 잘 수 있도록 손주를 데리고 와 돌봤다. 힘들었지만, 처음 안아 보는 손주는 천사 같았다.

"우리 손주 이쁘다. 우리 손주 잘잔다."

밤마다 손주를 안고, 업고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한 달 뒤 산후조리를 마친 딸이 나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 고마워. 이제 집에 가서 애 잘 키우고 잘 살게."

그렇게 딸은 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쓰러졌다. 정신없이 일하고, 손주까지 돌본 탓에 심장판막증으로 약을 먹어야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수시로 팔이 저렸지만, 단순히 근육통으로만 생각했다.

딸은 모든 게 자기 탓이라 울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땐 말이 나오지 않아 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 둘째 딸의 결혼식이었다. 딸과 가족들은 나 때문에 결혼식을 미루고 싶어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준비가 끝나 있었고, 사돈 쪽도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둘째 딸의 결혼식 날, 병실에 큰딸과 같이 있었다. 큰딸은 간병을 핑계 삼아 내 옆에 있었지만, 친척들이 시집 안 간 언니가 동생 결혼식 보는 건 좋지 않다며 오는 걸 꺼렸다. 우리 둘은 말없이 앉아 시계만 바라보았다. 결혼식이 시작할 시각이 되자 눈물이 흘렀다. 옆을 쳐다보니 큰딸도 울고 있었다. 자식 중 제일 먼저 결혼하는 둘째 딸의 결혼식을 엄마인 내가 볼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조금 뒤 남편 전화가 왔다. 결혼식장이 눈물바다였다며 흐느끼며 말했다.

"당신 없으니 신랑, 신부, 친척들 다 너무 울어서... 이런 결혼식은 처음이다."

둘째 딸도 전화와 아무 말 없이 엄마를 부르며 울기만 했다. 아직 말이 어눌한 난 간신히 한마디만 전할 수 있었다.

"잘... 사...알...아라."


그렇게 나의 둘째 딸은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결혼식을 눈물로 치렀다. 미안하다. 내 딸.




엄마는 동생 결혼식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아파한다. 동생은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자기 탓이라 미안해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아픔을 가진채 진하게 사랑한다.


이번에 엄마가 죽을 수 있다는 의사말에 동생은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나는 동생의 절규 섞인 울음에 더 슬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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