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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아현 Apr 24. 2024

4. 도천댁 아닌 도천댁

나도 엄마가 있었다.

쓰러지고 3일 뒤 의식을 찾았다.  가끔 의식을 잃고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저승사자를 봤다거나 어둠 속에 밝은 빛을 봤다고 했다. 그러나 난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의식을 잃은 사람 중에 엄마를 봤다는 사람도 있던데, 난 그리운 엄마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도천댁이었다. 도천에서 시집와서 도천댁이 아니라 같은 마을에서 시집온 사람이 두 명이라 엄마는 그냥 인근 지역 이름을 따 도천댁이라 불렸다.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이름이었지만 엄마는 도천댁으로 불리는 걸 좋아했다.

도천댁인 엄마는 29살에 혼자가 되었다. 순하고 착하기만 한 남편이 사라진 다음 혼자 논갈고, 밭 간 수확물을 10리 넘어 있는 장에 내다 팔며 2남 2녀를 키웠다. 특히 3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를 위해 모진 세월을 다 견뎠다. 엄마는 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6.25 때 적군이 마을로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짐을 챙겨 산속으로 뛰었다. 엄마는 갑자기 땅을 파기 시작하더니 땅속에 쌀과 음식을 파묻었다. (엄마의 대처 덕분에 적군이 쓸고 간 이후 우리 집만 먹을 음식이 남아있었다.) 그러고는 나를 엎고, 언니 오빠를 이끌어 산속으로 달렸다. 마을 사람이 모두 모인 산속은 적막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울기 시작했다.

"고추 줘. 고추. 고추. 나 고추 먹고 싶어."

그랬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추를 좋아했고, 적막한 산속의 불안감 때문인지 고추가 너무 먹고 싶었다. 숨쉬기조차 조심스러운 곳에서 나는 고추를 외치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나로 인해 숨은 곳이 발각될까 떨며 나를 대신해 엄마를 나무랐다. 그러나 엄마는 미안하다 하면서도 나를 야단치기보다 내게 고추를 줄 수 없음에 안타까워했다.(엄마는 평생 내게 이 고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지금도 고추를 좋아한다. 아삭아삭한 고추 몇 개만 있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그리고 고추를 먹을 때마다 울고 있는 나를 안고 달래며 숨죽였을 엄마가 생각난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할 일이 없었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멍청하게 앉아 TV를 보거나 먼 산을 바라보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문득 엄마가 보고 싶었다. 10년 전 돌아가신 엄마가 살아계신다면 지금 내 모습에 얼마나 슬퍼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엄마 사진이라도 보려고 조심히 기어가 오래된 앨범을 펼쳤다. 결혼사진에서 엄마를 본 기억이 났다. 원수 같은 남편의 총각 때 사진을 시작으로 오래된 추억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앨범 중간에 사진이 덤성덤성 비어있었다. 원래 있어야 할 사진이 제 자리에 없었다. 남편이 월남 전 참전 중에 사귀었던 아오자이 입은 예쁜 월남 아가씨 사진이 있었는데 그 사진이 없었다. 남편의 첫사랑이고 추억이라 나는 그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 결혼식 때 양가 부모님과 같이 찍은 사진이 있던 곳도 비어있었다. 이상했다. 남편이 오길래 물었다.

"여기 사진들 어디 갔어? 자기 첫사랑이랑 우리 엄마 사진이랑 몇 개가 없는데."

"어? 그러게. 어디 갔지?"

남편이 버벅거리며 말했다.

"이상하다. 우리 엄마 사진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없어졌네."

"에잇!"

갑자기 남편이 나가버렸다. 뭘 숨기는 건지, 왜 말을 못 하는 건지 이상했다. 몇 년 동안 펼쳐보지 않은 사진이었는데 누가 왜 이 사진을 없앴을까?


저녁 늦게 남편이 왔다. 나는 다시 되물었다.

"사진 어디 갔어?"

"그게... 그게..."

뜸 들이던 남편이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에잇! 그 여자가 다 찢었다."

"뭐?"

남편을 좋아했던 여자 중에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친한 이웃도 있었다. 이사 오고 급격히 친해져 형님 동생하며 잘 지냈는데, 알고 보니 딴마음으로 우리 집에 자주 온 여자였다. 그런데 세상에 그 여자가 남편의 첫사랑과 우리 부부의 결혼사진을 몰래 찢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미친..."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몸이 성하면 남편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몸은 내 마음과 달랐다.

 

하나밖에 없는 엄마 사진이 없어졌다. 그것도 나를 이렇게 만든 나쁜 X 때문에... 누워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남편은 아무 말 못 하고 계속 내 눈길을 피했다.


나 하나를 위해 고향을 버리고 부산까지 따라 내려와 딸 집, 아들 집 눈칫밥 먹으며 살다가 불쌍하게 돌아가신 우리 엄마를 사진으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저런 인간과 살아야 되나? 전에는 애들을 혼자 키울 자신이 없어 이혼하지 못했고, 이젠 나 혼자 살아갈 수 없어 이혼하기 어렵다.

내 팔자야!

도대체 사람이 뭐가 좋아 그 많은 여자들이 그토록 목을 맸을까? 그런데 결국 내가 50년을 같이 살고 있네.  그러고 보면 결국 승자는 난가? 참 의미 없고, 남는 게 없는 패자 같은 승자다.

 



가끔 엄마에게 지금이라도 이혼하라고 농담처럼 권한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50년을 사랑하며 산 적 없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니 아빠 없인 못 산다."

지금 보니 진정한 승자는 아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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