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일주일 전의 일이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 옷은 뭘 입을지 간식은 뭘 가져갈지 이야기하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그때 같은 반이지만 썩 친하지 않은 친구가 다가왔다. 그 친구는 나뿐만 아니라 친한 친구가 별로 없었다.
"아현아. 수학여행 갈 때 버스에서 나랑 같이 앉을래?"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왠지 거절하기 어려웠다.
"응. 그러자"
그리고 조금 뒤 짝지가 자리에 앉으면서 내게 말한다.
"아현아~ 우리 버스에서도 짝지다!"
'앗! 이런. 우짜지?'
이미 다른 애랑 앉기로 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반짝이는 눈으로 해맑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짝지를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아니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
"응... 그러지 뭐..."
대답하면서 알 수 없는 찜찜함과 불안감이 몰려왔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 4명이 함께 밥을 먹고 둘러앉아 수학여행 이야기를 하며 한껏 들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말했다.
"야, 우리 가위바위보로 2명씩 버스 짝지 정하자."
'아... 진짜 어쩌지.'
미처 내가 답하기도 전에 가위바위보가 시작되었고, 나는 얼떨결에 주먹을 내밀었다.
그렇게 난 3명의 친구와 수학여행 버스에서 짝이 되겠다고 약속을 해버렸다.
시간이 지나 수학여행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렇게 기다렸던 수학여행인데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 어떻게 하지? 누구랑 앉아야 되지? 수학여행 가지 말까? '
나의 우유부단함은 결국 수학여행을 포기하는 데까지 생각이 뻗쳐나갔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말할 용기도 없었다.
드디어 수학여행 가기 전 날이 되었다. 제일 먼저 같이 앉자고 제안한 친구가 내 자리로 걸어왔다.
"아현아! 낼 같이 앉는 거 맞지?"
그러자 내 옆에 있는 짝지가 말했다.
"아현이 나랑 앉기로 했는데..."
그때 뒤에 있던 베스트 프렌드가 말했다.
"아현아. 니 가위바위보로 나랑 앉기로 했잖아."
세 명은 동시에 나를 쳐다봤고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더듬거렸다.
"그게... 음... 그게..."
"야! 니 뭔데? 웃기네 진짜."
세 명은 동시에 나를 째려본 후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났다. 화난 친구들의 마음이 너무 잘 이해되었기에 나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내일 수학여행 준비는 다 했지? 내일 운동장에 모이면 5호차를 타는데 버스는 번호순으로 앉는다. 알겠지?"
'이게 뭐람. 미리 이야기해 주시지.'
괜히 나의 우유부단함, 거절하지 못하는 못난 성격만 모든 친구들에게 들켜버렸다. 결국 난 수학여행 내내 외톨이였다. 그러나 그 일로 내가 얼마나 우유부단하고, 결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이후 타고난 성격을 고치기는 쉽지 않았지만,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나의 우유부단함을 꼭꼭 감춘 채 눈에 힘주고 단호한 척 연기를 했다. 덕분에 얼마 전 후배에게 전생에 이순신 장군이었을 것 같다는 칭송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작은 결정 하나도 제대로 내리지 못해 남몰래 덜덜 떨며 고민하는 나를...
그런데 이런 내게 도움이 되는 좋은 친구가 생겼다. 바로 타로! 재미 삼아 배웠는데 이건 완전 나에게 딱이다!
몇 년 전 코로나 예방 접종이 의무적으로 시행될 무렵, 우리 부서에 우선 접종 대상자 명단을 내라는 문서가 왔다. 당시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가 심할 때라 아무도 먼저 맞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때 난 당당히 손을 들었다.
"제가 먼저 맞겠습니다!"
모두 걱정과 함께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언니 안 무서워요? 진짜 용감하다."
"그게 뭐라고..."
그러나 사실 난 점심시간에 남몰래 타로를 펼쳤었다.
"나 예방접종 맞으면 어떻게 될까?"
나의 타로가 아무 일 없고, 괜찮다고 결정 해 주었다. 예방접종을 하고 시간이 지난 후 직원들에게 예방접종을 먼저 하게 된 나의 타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해 줬다.
그런데 며칠 뒤 사무실 메신저로 쪽지 한통 왔다.
"아현씨. 내일 간부들부터 솔선수범해서 코로나 예방접종 맞으라는데 그 뭐 타로라 했나? 나도 그거 좀 봐줄 수 있나? 이거 원 걱정이 돼서..."
세상에! 평상시 거의 말씀이 없으시고, 점잖기로 소문난 과장님이었다.
'나만 우유부단함과 결정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구나.'
지금까지 두껍게 쓰고 있던 나의 가면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우유부단, 결정 문제, 귀 얇은 아니 없는 나! 나는 오늘도 아무도 모르게 타로를 펼친다.
"나 쌍수해도 될까?"
검 3번 카드
심장에 칼이 꽂힐 만큼 큰 아픔과 상처만 남는다고 하지 말란다. 결국 난 친구 따라 상담받고, 수술 날짜와 예약금까지 걸고 왔음에도 예약을 취소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정말 쌍수하기로 한 날 양쪽 눈에 심한 다래끼가 나고, 며칠 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한 달 내도록 울 일이 생겼다. 수술했으면 내 눈이 성하지 않았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