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아현 Apr 21. 2024

귓속말

선생님, 나의 선생님


따뜻한 입감과 함께 내 귓가를 울렸던 말

"아현아. 내 눈에는 니가 제일 예쁘다."

그 귓속말로 나는 다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첫날! 친한 친구들과 떨어져 모르는 친구들 속에 어색하게 앉았다.  

쭈뼛쭈뼛,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앞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예쁜 여자 선생님과 뚱뚱한 교감 선생님이 함께 교실로 들어왔다.


"자! 자! 주목. 이번에 5학년 8반을 맡게 된 선생님은 올해 교육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최고의 선생님이다. 그러니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하도록!"


4학년 때까지 담임을 교감 선생님이 직접 소개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어깨를 한껏 올린 채 담임을 소개하는 걸 보면 우리 선생님은 뭔가 특별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특별한 나의 선생님은 12살의 나, 아니 지금의 내가 나로 살 수 있도록 준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의 첫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첫날 첫 수업, 선생님은 칠판에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수업 제목을 적었다. 그런데 판서가 조금씩 위로 올라가더니 삐뚤빼뚤해졌다.

'선생님도 선생님이 처음이라 긴장되시는구나. '

선생님은 처음이라 긴장하던 그 순수함과 열정을 간직한 채 1년 동안 우리에게 깊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혈우병을 앓는 아이가 창문을 닦다 떨어져 코피를 흘리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뛰던 선생님.

내 짝지가 말없이 학교에 오지 않자 집까지 찾아가 아이를 확인하고, 짝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서 눈물을 흘리던 선생님.

선생님은 정말 특별했다.  


하루는 수업 시간 중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들이 쉬는 시간인  큰소리로 떠들며 뛰어다니다 교감 선생님께 딱 걸렸다.


"담임 선생님 어디 가셨어? 선생님 없다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큰 덩치에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교감 선생님 뒤로 놀라서 뛰어 온 선생님이 보였다. 선생님은 교감 선생님께 고개 숙여 사과한  조용히 교실로 들어왔다.


"전부 눈 감고 고개 숙여. 그리고 너희들이 지금 한 행동이 뭐가 문젠지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는 거야. 알겠지?"


교실은 조금 전과 달리 숨 쉬는 소리마저 미안할 만큼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모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응시했다.

 정적을 깨는 선생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아, 혼나나? 손바닥 맞을까? 근데 왜 조용하지?'

걱정과 궁금함에 눈을 살짝 떴더니 선생님이 앞에 있는 아이의 귀에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침을 꼴깍 삼키며 내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


드디어 선생님이 왔다. 선생님은 가까이 다가와 내 귀에 부드러운 입을 갖다 대었다.


"아현아! 내 눈에는 니가 제일 이쁘다. 뭐든지 열심히 하는 니가 참 좋아. 사랑한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이쁘다... 사랑한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났다. 살짝 눈을 뜨고 선생님을 쳐다보니,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찡긋하더니 다시 뒷자리 친구에게 걸어갔다.


나는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였다. 선생님 말도 잘 듣는  아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선생님에게 사랑 아니 관심조차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건 엄마가 학교에 한 번도 오지 않는, 평범한 내겐 없는 건지 알았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선생님이 이쁘다고, 사랑한다고 했다.

어쩌면 선생님은 모든 아이에게 똑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알게 되었다. 나는 이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아이였다,


올해도 스승의 날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님, 스승의 날이라 생각나서 연락드려요."

"야는 내가 무슨 니 스승이고? 같이 나이 들어가는 친구지."


3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해온 나의 선생님은 지금은 나의 어머니, 나의 친구이다.


세상 경쟁에 뒤처진 듯 우울할 때, 삶에서 길을 찾지 못해 헤맬 때   부드러웠던 귓속말이 떠오른다.


"내 눈에는 니가 제일 이쁘다. 사랑한다."




선생님은 몇 해 전 명예퇴직을 하셨다. 일이 힘들고 싫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담임이 되면 엄마들이 싫어하는 게 보여서 이젠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아."

나이 든 담임을 좋아하지 않는 젊은 엄마들의 눈빛에 선생님은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보던 일을 그만두셨다.

이전 02화 이마에 난 구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