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아현 Jun 27. 2024

13. 그리운 나의 어머님!

차마 하지 못한 말. 죄송합니다. 

시어머님은 나에게 진심이었다. 

그러나 난 그렇지 못했다. 

오늘도 미안함에 눈물을 삼킨다. 




남편과 결혼한 것은 시어머니 때문이었다. 

시장을 오가며 나에게 반한 건 남편이 아닌 시어미니였다. 시어머님은 나를 며느리로 맞기 위해 애썼고, 그 노력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늘 내편이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을 때도 시어머니가 나를 대신해 남편을 때렸고, 남편을 대신해 내게 무릎을 꿇었다. 

내가 아프다 하면 누구보다 먼저 약을 지어오셨고, 제사 때는 내게 쉬운 일만 시켰다. 

그래서인지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을 때, 아이들 다음으로 시어머니가 눈에 밟혔다.  


늘 대장부처럼 집안을 휘어잡던 시어머님은 시아버님이 돌아가시자 기세를 몰아칠 곳을 잃은 탓인지 기력이 떨어졌다. 친구들과 치던 십 원짜리 고스톱도 치지 않았고, 집에 자주 오던 친구들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혼자 있으며면 자주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점점 판단력이 흐려졌고, 거동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머님 근처에 살며 수시로 찾아갔지만, 더는 혼자 둘 수 없었다.  


어머님에게는 며느리가 셋이었다. 그러나 둘째는 먼 지방에 살았고, 셋째는 시어머님이 큰 형님인 나를 가장 좋아했으니 내가 모셔야 된다고 주장했다. 셋째가 잠시 어머님을 모셨지만 이불에 대소변 실수를 하자 바로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다. 

결국 한쪽 수족을 못쓰는 내가 어머님을 모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불편한 몸으로 어머님을 챙기며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님의 기억과 기력은 점점 더 떨어졌고, 이불에 실수가 잦았다. 매일 이불을 빠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기저귀를 채우고 싶었지만 절대 원하지 않았다. 


몸은 힘들고, 점점 지쳐갔다. 40년을 같이 살며 한 번도 짜증을 낸 적이 없던 나인데 매일 반복되는 일들에 폭발할 것 같은 짜증이 수시로 올라왔다. 


결국 시어머님이 이불에 실수한 어느 날, 나는 화를 참지 못했다.

"어머님! 제발 똥오줌이 누고 싶으면 말을 하이소. 진짜 하루이틀도 아니고 못살겠으예. "

내가 버럭 하자 기억이 오락가락하던 어머님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순간 잘못했다는 생각이 몰려왔지만, 이미 뱉은 말을 범벅하기는 어려웠다. 


그 뒤 남편은 더 이상 내가 어머님을 모시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요양병원에 어머님을 입원시켰다. 병원 입원하는 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머님의 눈물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요양병원에서는 매일 집에 간다며 침대에서 내려오는 어머님을 낙상 위험 대상자로 분류하고 침대에 눕힌 채 손발을 묶어 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하며 병원에 항의했지만, 거동이 불편한 어머님이 집에 가겠다며 순식간에 침대 옆으로 내려오려는 바람에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손발 묶이는 고문을 겪는 어머님을 그대로 병원에 둘 수는 없었다. 결국 퇴원시켜 집으로 모셔왔지만, 어머님은 더 정신이 없어져, 가끔 나도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다시 요양병원으로 입원시켰고, 며칠 뒤 어머님은 돌아가셨다. 


난 평생 누군가에게 미안할 만큼 잘못한 적이 없다. 그런데 딱 한 분, 시어머님을 생각하면 가슴속 저 밑바닥에 숨겨둔 죄책감이 솟구쳐 오른다. 

시어머님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손발 묶이는 고문을 당하게 하고, 어머님에게 참지 못하고 낸 짜증이 미안해 지금도 나를 힘들게 한다. 

'어머님, 진짜 미안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빌고 또 빌어도 그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가끔 엄마보다 시어머님이 더 그립다. 마지막 모습이 너무 아픈 탓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지금도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삼킨다. 

우리는 한 손으로 그렇게까지 모신 엄마를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할머니와 엄마는 평생 서로에게 진심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