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아현 Jun 12. 2024

11. 미워서 사랑한다.

몸 아픈 게 마음 아픈 것보다 낫다.

원수 같은 남편!

그런데 사랑한다.



25년 전 내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원수 같은 남편은 여전히 그랬을지 모른다. 아니 그랬을 거다.

밖에서는 재미있는 사람으로 뭇 여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집에 오면 화와 짜증으로 온 가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나에게는 물론 세 아이에게도 따뜻한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고, 아이들이 몇 학년인지, 무슨 공부를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가 아픈지 등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집에 오면 똑같은 말만 했다.

"밥묵자. 시끄럽다. 문 닫아라. 싸우지 마라. 확 마 맞을라고! 돈 없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집에 와서 한 말은 이게 전부였다. 아이들도 아빠가 일찍 집에 오는 날이면 아빠 눈치를 보느라 크게 웃지도, 마음껏 떠들거나 싸우지도 못했다. 우리는 늘 남편 눈치를 보며 남편 때문에 불안했다.


그런데 25년 전 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 후 남편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툭툭 던지는 정 없는 말투는 변함없지만, 말의 내용이 달라졌다.  

"밥 먹었나? 밥무라. 좀 더 자라. 누워라. 쉬라. 내가 하께."

갑자기 변한 남편의 말이 어색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 난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사실 부끄러워 아무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이런 다정한 말이 너무 듣고 싶었다. 아빠 없이 자랐지만, 오빠, 언니, 엄마의 따뜻하고 다정한 말만 듣고 자란 나는 고함치고 무시하는 남편의 말을 듣는 게 무척 힘들었다.  

물론 지금도 고함치고 무시하듯 말하는 태도는 그대로지만, 예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말속에 뭔지 모를 남편의 마음이 느껴진다. 딸은 아빠가 바뀐 게 없다고 툴툴되지만, 그건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최근 심장내과를 찾았을 때 나를 본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아저씨가 의사 선생님께 살려달라고 그렇게 사정하더니 덕분에 살았나 봐요."

'이 양반이 부끄럽게 뭐라 한 거고?'

민망한 마음으로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나는 25년 동안 같은 의사 선생님께 진료 중이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뜻밖에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도, 심장 수술을 했을 때도, 그리고 최근에 침 때문에 세균에 감염되어 죽을 뻔했을 때도 심장내과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울부짖었다고 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의사 선생님은 절규하듯 울부짖는 남편이 안쓰러워 자기 과가 아닐 때도 담당 과를 찾아가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는 게 아닌가!

진작 그렇게 잘했으면 내가 쓰러지지 않았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25년 내가 힘들었던 것만큼, 남편은  25년 동안 나를 돌보느라 힘들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딱 결혼 50주년이다.)


어제는 딸이 물었다.

"엄마는 그래 고생했으면서도 아빠가 좋나?"

"응. 좋다."

"진짜 이해가 안 된다."

"너거 아빠 말만 저렇지 마음은 안 그렇다."

그래도 딸은 이해 못 하는 표정이다.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이해 못 하겠지만, 그래도 난 미워한 만큼 원수 같은 남편을 사랑한다.



엄마는 아빠에게 가끔 애교를 부린다. 그러면 아빠는 기겁하며 말한다.

"니가 애가? 미쳤나?"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로 마주 보고 웃는다. 도통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사랑하며 늙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엄마는 자신이 아파서 다행이라는 말했다. 안 아팠다면 저런 아빠 모습을 평생 못 보고 미워만 하다 죽었을 거라고... 몸이 아픈 게 마음 아픈 것보다 낫다는 엄마의 말에 마음은 아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