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었다. 남편이 웬일로 아이들을 데리고 금강공원에 가자고 했다. 흔하지 않은 아니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80년대 금강공원은 코끼리가 있는 동물원이 있었고, 오리배, 비행기, 회전목마 등 몇 안 되는 놀이기구도 있었다. 당시 인근에서는 최고, 아니 유일한 공원이라 어린이날이면 사람에 떠밀려 다닐 정도였다. 당연히 놀이기구를 하나 타려고 해도 1,2시간 줄 서는 건 기본이었다.
"에잇! 줄만 서다 시간 다 보내겠다. 아이들 딱 하나씩만 태우고 후딱 가자."
남편은 긴 줄을 기다리기 싫은 듯 말했다. 그러나 실상은 기다림보다 놀이기구 타는 비용을 더 아까워했다.
아이들은 아빠 눈치를 보면서도 놀이기구 탄다는 기쁨에 긴 줄을 기다리는 고통도 견뎠다. 그나마 줄이 짧은 기차를 타고 내리는데 남편이 정말 집에 가자고 했다. 아이들은 믿기지 않는 듯 나를 쳐다봤다.
"엄마! 저기 오리배 한 번만 태워줘."
나는 몇 시간을 기다려서라도 아이들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됐다. 뭘 또 타!"
"여기까지 왔는데 애들이랑 좀 더 있다 갑시다."
"그럼 큰 애들은 다 컸으니, 아들만 저거 한 번 더 태워주고 온나."
딸들도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딸들은 남동생만 오리배를 태워주라는 아빠 말에 울기 시작했고, 남편은 사람들 많은 데서 운다며 소리를 질렀다. 딸들도 태워주자 했지만, 남편은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정말 아들만 오리배를 태워주고 공원을 나왔다.
어린이날 왜 놀이동산을 가자고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났지만, 남편의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딸들은 오리배를 타지 못한 서러움에 공원을 빠져나오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놀이동산을 나오자 문 앞에 짜장면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애들 배고픈데 짜장면 한 그릇 먹고 갑시다."
애들은 오리배는 잊어버리고 아빠에게 짜장면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빠! 짜장면 먹고 가자."
그러나 남편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오늘 돈을 얼마나 썼는데. 짜증면은 무슨 짜장면. 집에 가서 밥 먹자."
"짜장면 먹고 싶어... 아빠... 한 번만"
딸들은 아빠 팔을 잡고 사정했지만, 남편은 딸의 팔을 내팽개치듯 던졌다
"확! 마! 자꾸 이러면 다시는 놀이공원 안 데리고 온다."
아이들은 다시는 놀이동산을 못 올까 두려워 짜장면 이야기를 거두었지만,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미웠다. 정말이지 아이들보다 돈이 소중하고, 아이들의 행복보다 자기가 더 중요한 남편이 미웠다.
집으로 돌아온 후 아이들은 며칠 동안 오리배와 짜장면의 서러움을 이야기했다.
"가자!"
"어?"
"가자! 놀이동산. 우리끼리 가자. 엄마가 다 해줄게."
나는 남편이 없는 날 그동안 모아둔 돈을 들고 아이들과 함께 놀이동산을 다시 찾았다. 타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원 없이 해 줄 생각이었다.
"진짜 다 타도 돼?"
아빠에게 주눅 든 아이들은 좋아하면서도 걱정하듯 물었다.
"응. 타고 싶은 거 다 타."
아이들은 오리배, 기차, 회전목마를 타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놀이공원 앞 중국집에서 짜장면도 먹었다. 나는 행복해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게 애들이지. 이렇게 좋아하는데 돈이 뭐라고...'
얼마 전 딸이 어릴 때 어린이날 간 금강공원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의 서러움과 다시 가서 놀이기구를 타고 짜장면을 먹었던 기억을 전하는데, 얼마나 서러웠으면 아직도 저렇게 기억하나 싶어 놀랐다.
놀이기구 타면서 입이 찢어질 듯 웃던 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추억으로 남아 있어 아쉽다.
엄마는 그랬다. 아낌없이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가 웃는 모습, 행복해하는 모습에 삶의 의미를 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불편한 몸으로 잘 걷지 못하고, 혼자 할 수 일이 거의 없지만, 우리가 웃고, 재잘거리는 모습을 늘 흐뭇하게 바라본다.
엄마가 누군가가 아닌 자신을 위해 살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결국 한 순간도 그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