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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아현 May 29. 2024

9. 시간을 거스르는 친구

너와 나의 세월은 함께 흘렀다.

쌍둥이라 불렸던 내 친구 순이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올해 초, 남편의 권유로 무면허 침쟁이에게 맞은 침이 잘못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지금은 정형외과적 위기는 넘겼지만, 수술 과정에 25년이 넘은 인공 심장이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하다는 심장내과 의사의 말을 들었다.

그 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하루 더 뛰어주는 심장 덕분에 하루를 더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면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다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렇지 않다. 그저 매일 살아있어 숨을 쉬고, 배가 고파 밥을 먹을 뿐 오늘 하루가 소중하다거나 아쉽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통곡하고, 나를 위해 눈물로 밤을 새우며 기도하던 두 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며칠 전 딸은 또 내게 물었다.      

“엄마 꼭 해보고 싶은 거 없어?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아무리 없다 해도 딸은 묻고 또 묻는다. 그러다 갑자기 내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순이 이모 만나러 갈까?”


순이는 내가 시집오기 전 26년을 두 집 사이에 놓인 담벼락이 무색할 만큼 붙어 다닌 친구였다. 옷을 잘 만들던 우리 엄마는 옷감을 사면 늘 똑같은 옷 두 벌을 만들어 나와 순이에게 입혔다. 주위 사람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붙어 다니는 우리를 쌍둥이라 불렀고, 다른 친구들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 우리 둘을 질투하며 부러워했다.

“쟤들 둘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이 없나?”


내가 먼저 결혼하고 혼자 남은 순이는 그다음 해 결혼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도시로 시집가 사는게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만나지 못했다. 가끔 고향에 행사가 있으면 만나졌지만, 그마저도 졸중이 이후에는 가지 못해 일 년에 한두 번 전화만 나눌 뿐, 20년 가까이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딸이 갑자기 순이 이야기를 꺼냈다. 순이 이름을 들으니 생각지도 못한 리움이 몰려왔다. 

"멀어서 우째 만나노?"

"내가 엄마 모시고 가면 되지."

"순이 집은 주택 2층이라 내가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럼 순이 이모 우리 집에 초대할까?"

딸은 순이가 오기 편한 자기 집으로 순이를 초대했다. 순이는 딸의 초대에 딸 집에 가도 되냐를 몇 번이나 물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순이는 벌써 을 싸고 있었다.


5월의 어느 비 오는 날, 순이를 만나기 위해 딸과 함께 시외버스터미널을 갔다. 이제는 늙었을 순이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나 저 멀리 빨점퍼를 입고, 등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양손 가득 짐을 들고 걸어 나오는 순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몇 해 전 교통사고로 허리 수술했다더니 순이의 허리는 휘어있었다.

'건강하고 예뻤던 우리 순이였는데...'

휜 허리로 걸어 나오는 친구를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순이는 절뚝거리며 잘 걷지 못하는 나를 더 안타까워하며 쳐다보았다.

"아이구! 니 개안나? 죽을 뻔했다는 소식 듣고 다시는 못만날지 알고..."

순이는 눈물을 삼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순이는 나를 위해 자신이 담은 된장, 장아찌 등 반찬을 가득 담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정 많은 건 그대로였다.


우리는 하루 종일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눴다. 어릴 때 먼 길을 걸어 학교 간 이야기, 쑥캐다 나무꾼 소리에 놀라 도망간 이야기 등을 하면서 우리는 순식간에 10대가 되어 있었다. 깔깔거리며 웃는데 갑자기 순이가 운다.

“니 절대 죽지 마라. 내 한번 더 볼 때까지 꼭 건강하게 살아 있어라. 알겠제?”

“죽고 사는 게 내 맘대로 되나? 그래도 우리 다시 보자."     


세월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순이는 밤 눈이 어두워 더 늦기 전에 집에 가야 했다. 나는 다시 딸과 함께 순이를 만났던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떠나는 걸음이 못내 아쉬워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던 친구는 결국 또 눈물을 흘렀다.     

“와 우노? 울지 마라.”

“그래. 알았다. 근데 우리 꼭 다시 보자.”     

"알았다."

생사가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왠지 친구와 약속을 지켜야 할 것 같았다.

       

친구가 떠나고 주위를 둘러보니 2024년 5월, 내 나이 77살이었다. 순이 덕분에 잠시 50년 전 세월 속으로 시간 여행을 다녀왔다. 친구는 그렇게 세월을 넘나드는 추억이었다.

       





엄마는 그날 무척 행복해 보였다. 교복 입고 학교를 뛰어다니던 학생이었고, 미니스커트 입고 거리를 활보하던 아가씨였다. 세월을 잊을 수 있는 엄마의 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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