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 오빠는 아직 소년이다.
"조금만 더 살아라.
오빠가 돈 많이 벌면 고기 사줄게. 알겠지?"
80살이 넘은 오빠가
70살이 넘은 동생에게 말했다.
작은 오빠는 나와 6살 차이지만, 아빠처럼 나를 이뻐하며 챙겼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오빠, 언니가 일찍 고향을 떠난 탓에 어릴 때부터 작은 오빠가 항상 내 옆에 있었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작은 오빠는 장사치가 요즘 젊은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하면 옷, 가방, 신발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런 오빠 덕에 동네에서 제일 멋쟁이였다.
결혼하고 남편이 속을 썩일 때도 작은 오빠가 더 흥분하며, 하루도 나를 그 집에 둘 수 없다며 오빠 집으로 데리고 가려했다. 그렇게 오빠는 어른이 되어서도 내 편이었다. 내겐 오빠가 친구고, 아빠고,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러나 오빠 인생은 편하지 않았다. 사업에 실패하고, 부인과 이혼하면서 아이들마저 엄마를 따라갔다. 이후 재기를 위해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빚에 쫓겨 가족, 친척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큰 빚을 갚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빠는 마지막에 나까지 찾아왔다. 나는 오빠를 돕고 싶었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돈은 절대 빌려줄 수 없다며 어렵게 찾아온 오빠에게 물도 한 모금 대접하지 않고 보냈다.
그리고 오빠와 헤어졌다. 빚 독촉에 시달린 오빠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이후 오빠 소식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25년이 흘렀다.
몸이 좋지 않아 힘겹게 밥을 먹고 있는데 딸이 물었다.
"엄마! 소원 없나? 혹시라도 더 늦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나는 소원 같은 건 없다고 그냥 편하게 죽는 게 소원이라 했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은 있었다. 그때 딸이 오빠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외삼촌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으면 뭐 할 거고? 어디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딸은 몇 해 전 친척 결혼식에서 오빠가 어느 암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암자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오빠 이야기를 꺼내자 다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암자 이름만으로 종일 인터넷을 뒤졌지만, 어디에 등록되지 않은 사찰인지 찾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딸이 말했다.
"엄마 어떤 사람이 등산하면서 산속에 이상한 절이 있다고 사진을 올린 게 있는데, 거기 암자 이름이 외삼촌 있다고 들은 그 암자 이름이네. 잠시만..."
딸은 인터넷 속 사진을 확대하더니 사찰 벽에 붙은 기도 홍보 플래카드에 있는 희미한 전화번호를 찾았다.
"엄마 밑져야 본전인데 전화 한 번 해볼게."
딸은 조심스럽게 전화기 버튼을 눌렸다.
"여보세요."
딸은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나에게 넘겼다.
"엄마! 목소리가 외삼촌인데."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를 했으면 말을 하세요."
오빠였다. 세월이 흘렀지만 오빠 목소리가 분명했다.
"오빠!"
"누고? 니 기야가?"
"어. 오빠 맞네."
내가 오빠 목소리를 한 번에 알아들은 것처럼 오빠도 내 목소리를 한 번에 알아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확인한 뒤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했다.
"나는 니가 죽은 줄 알았다. 그때 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 듣고 그렇게 세상을 떴는지 알았다. 미안하다. 오빠가 미안하다."
우리는 전화기를 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며칠 뒤 딸과 함께 오빠를 찾아갔다. 오빠는 내가 온다는 소식에 일찍부터 사찰 입구로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는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나를 보더니 한걸음에 달려와 나를 안고 울었다.
25년이 지났지만 오빠는 어릴 때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오빠 눈에도 내가 그때처럼 이쁜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못했다.
오빠는 25년간 빚 독촉에 시달리며 가족, 친척과 모든 인연이 끊어졌고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사찰을 돌보며 조용히 살아왔다고 했다. 지금도 조금씩 빚을 갚고 있어 돈 한 푼 없지만, 몇 십억 부자일 때보다 마음은 편하다고도 했다. 오빠는 내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그리고 죽기 전에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내 손을 잡고 놓칠 않았다.
그 뒤 오빠에게 일주일이 멀다 하고 전화가 온다.
"기야! 오빠야가 돈 많이 벌면 고기 많이 사줄게. 그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라."
80살이 넘은 오빠가 언제 무슨 돈을 벌어 고기를 사준다는 말인지 웃음이 나오지만, 배부르게 고기를 먹은 것보다 행복하다.
오빠는 이번에 내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듣고 그 멀리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절대 니 안 죽는다. 내가 매일 기도하거든.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알겠제?"
왜 진작 엄마의 오빠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됐다. 어쩌면 그때는 간절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게 간절해졌다. 엄마가 눈을 감기 전 하고 싶은 일은 다 해주고 싶다.
엄마는 외삼촌을 만나면 아직도 어린 막내 여동생인 것처럼 어리광을 부른다. 어색하지만 어색한 그 모습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