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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아현 May 15. 2024

7. 나의 아들을 찾습니다.

그립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리움

이 노무 자슥은 죽어야 정신 차리지!

입이 보살이었다.


새해가 밝았다. 혼자 있는 아들놈 떡국이라도 챙겨 먹이려고 저녁에 찾아가 볼 참이었다. 그런데 큰딸이 새해를 맞아 저녁을 같이 먹자고 연락이 왔다. 무슨 날이면 나를 먼저 챙기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안부를 묻는 큰딸이 이번 새해도 어김없이 우리를 제일 먼저 챙겼다. 아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내일 찾아볼 요량으로 딸과 맛있고 행복한 저녁을 먹었다. 새해 해돋이를 본 이야기, 아이들이 자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딸과 함께 하는 저녁은 늘 그렇듯 즐거웠다.


아들은 혼자 살았다. 결혼도 직장도 실패하고, 유일하게 의지한 아이들마저 엄마 곁으로 떠난 후 아무도 없이 혼자 살고 있었다. 안쓰럽고 불쌍하면서도 못난 놈이라 원망했다.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을 만큼 귀하게 키운 아들은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 후 순하디 순한 아들은 힘으로 서열을 세우던 덩치 큰 남자 애들한테 맞고 왔다. 너무 순해 이런 일이 생겼다며 아들 편을 들며 때린 놈들을 욕했다. 그런데 얼마 뒤 순한 우리 아들이 상대 아이 이를 몇 개 날렸다며, 피해자 엄마가 거금 80만 원을 요구했다. 맞기만 한 줄 알았는데, 때렸다고 하니 솔직히 맞고 왔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기뻤다. 그런데 순하다고 걱정한 아들은 순한 게 아니었다. 아니 내 눈에는 순하게 보이는 게 싫어 순하지 않은 척하며 사는 듯 보였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고, 천재라고 생각한 아들은 천재성을 잃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군대 첫 휴가 나온 , 친구와 잘 놀고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그날,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들을 택시 기사가 보지 못했다. 다행히 전속력으로 달린 택시가 아니었기에 목숨은 건졌지만, 아들은 다리에 수많은 철심을 박고 장애인이 되었다. 그리고 군입대 100일 만에 의가사 제대했다. 그 뒤 아들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아니 아들의 마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도, 달리기도 하지 못하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세상과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만 키웠다.


대학을 다니며 만난 여자 친구와 이른 임신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마땅한 직장이 없던 아들은 우리에게 생계를 의지하며 살았다. 두 아이를 낳고 다행히 대기업에 장애인 전형으로 입사했지만,  입사 한 달 만에 친구 보증을 잘못 서 빚더미에 앉았고, 월급으로는 빚 갚기에도 빠듯했다. 취업은 했지만, 생계가 해결되지 않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하듯 우리는 아들의 생계를 도왔다. 설강가상 다니던 회사도 부도가 나 버렸다.  장애, 빚, 퇴사로 아들은 점점 삶의 의욕을 잃었다. 결국 며느리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갔고, 마음을 의지했던 아이들마저 엄마를 따라가 버린 후 아들은 혼자가 되었다. 아들은 평생 부모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고, 남편은 능력 없고 의지 없는 아들을 원망하며 돈을 줄 때마다 비난했다.


"못난 놈! 저 노무 자슥한테 주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저 노무 자슥은 죽어야 정신 차리지!"


나는 차마 입밖에 내진 못했지만, 나 역시도 일어설 의지조차 없는 아들을 원망했다.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참고 견디며 노력하는 힘이 없었다. 게다가 운도 없었다. 

이후 아들은 이것저것 해보려 했지만, 늘 급전이 필요한 탓에 성실하게 땀 흘려 돈을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는 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돈은 없었다. 


새해 첫날, 큰딸과 저녁을 먹는 동안 아들 이야기가 나왔다. 술을 한잔 들이켠 남편은 며칠 전 돈을 받으러 온 아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쫓아버렸다고 말했다.

"저거 낳고 내가 좋다고 너거 바나나 사 먹이고, 너거 엄마 업고 다녔다니... 내가 저거 때문에 내 명에 못살게 생겼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오던 아들이 그 뒤 삼일동안 발길을 끊었다. 내심 그게 마음에 걸려 오늘은 가볼 참이었는데 큰딸이 와서 내일로 미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아들을 찾아갔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4일째 집에 오지도 않고, 전화도 없는 놈이 뭐 하나 볼 생각으로 대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집안에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남편은 신발도 벗지 않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고, 그곳에서 아직은 따뜻한 아들 시신을 발견했다.

아들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새해 첫날 목숨을 버렸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너무 아픈데 몸만 떨릴 뿐 눈물이 나기 않았다. 너무 슬프면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걸 70년 만에 처음 알았다.


큰딸이 한걸음에 달려와 자기 탓이라며 울었고, 친척들은 하나밖에 없는 장손을 잃었다며 오열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들이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었다. 난 아들이 세상을 이겨내는 힘을 가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는 너무 귀한 아들을 유리처럼 예쁘고 조심스레 키웠다. 이렇게 쉽게 부서질지 모르고... 


아들이 떠난 후 수면제 없인 잠을 자기 어렵고, 맛있는 밥을 먹은 적이 없다. 너무나 그리운데 꿈속조차 찾아오지 않는 아들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그립다. 그립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립다. 


이번에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큰딸이 옆에서 울면서 말했다.

"엄마, 절대 죽으면 안 돼. 설령 아들이 찾아와 엄마 같이 가자고 해도 절대 따라가면 안 돼. 알겠지?"

나는 알았다고 했지만, 아니었다. 만약 수술 도중 아들이 나를 찾아오면 앞으로 절대 외롭지 않도록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또 나는 살아남았다.




그 뒤 엄마는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잠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 듯 지냈다. 엄마에겐 아버지도, 남편도, 아들도 상처만 남긴 대상이었다. 

엄마는 어릴 때 본 사주에서 오복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다며 자신의 복이 언제쯤 올지 늘 궁금해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엄마에게 그런 복은 없었다. 특히 남자 복은 없었고, 없을 것이 확실하다. 나는 엄마에게 나머지 복이 지금이라도 오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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