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보다 별명이 더 유명해진 녹원사
내가 금각사(金閣寺, きんかくじ)를 처음 본 것은 486, 586이라고 컴퓨터를 부르던 때 윈도우 바탕화면에서였다. 지붕 모양으로 봐서는 분명이 일본인데, 바탕이 온통 금색으로 칠해져있어서 이것이 진짜 금인지 아닌지 궁금하기도 하고 해질녘 호수에 비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동안 바탕화면으로 해둔 적이 있었다. 후에 학교 교과서에서 이것이 교토에 있고 이 건물의 이름이 '금각사'라는 것을 알았다. 일본에 간지 10개월이 지나서야 뒤늦게 어릴 때 동경하던 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금각사는 일반적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교토의 관광지 중에 가장 북쪽에 있다. 전철을 타고 가도 어차피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교토역에서 버스를 타는 것을 추천한다. 시영버스 205번을 타면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다. 교토역이 아닌 곳에서 출발한다면 5, 15, 51, 59, 101, 102, 201, 203, 204번이 금각사에 도착한다.
책에도 같이 유 교수가 같이 답사를 하셨지만 상국사, 금각사, 은각사는 임제종(臨済宗)이라는 같은 종파다. 세 사찰이 한 홈페이지에 금각,은각사만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 종파로는 상국사파로 가장 머리에 있다. 홈페이지(http://www.shokoku-ji.jp)가 플래쉬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스럽게, 감탄이 절로 나오도록 이쁘게 잘 만들었는데 너무 전개가 느려서 답답하면 처음 메인 화면에서 'HTML로 보기'를 하면 된다. 도시샤 대학을 들렀으나 상국사에는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좁은 도로를 따라 버스에서 내리면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위치에 금각사가 있다. 날이 화창하여 역시나 사람이 많다. 입구에서 하나 충격을 받았다. 큰 바위에 음각된 세계문화유산 금각 녹원사(世界文化遺産 金閣 鹿苑寺)라는 글자. 녹원사(로쿠온지, ろくおんじ)? 그랬다. 원래 금각사의 진짜 이름은 교토가 아닌 나라(奈良)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슴동산절' 녹원사였다. 절이 금박으로 덮여있어 '금각'이라고 부르다보니 별명이 본명보다 더 유명해진 것이다. 공식 홈페이지와 구글 상에서도 녹원사는 아예 없고 금각사라는 이름으로 올렸다. 많이 불리고 사랑받는 이름이 진짜 이름이 아니겠는가.
입장료는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지는 400엔. 부적처럼 생긴 길다란 표를 준다. 표를 다시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여만 주고 입장하게 되어있다. 바뀌지 않는 것 같은데 얌체라면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그대로 가져가도 문제 없을 듯 보였다.
들어가면서 유홍준 교수가 혹평한 촌스러운 벤치를 찾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일본 사람들이 혹시 유 교수 글을 보고 바로 치운 것이 아닐까 하고 혼자 미소지으며 들어갔다. 참로를 따라 들어가 바로 오른쪽을 꺾는 순간, 나도 책 속의 관람객과 조금도 차이 없이 "우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기가 막혔다. 황홀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것은 무조건 '아름답다'라고 해야할 정도로 무의식에서 나오는 감탄사가 연이어 터졌다. 날이 기가 막히게 좋은 날이어서 태양빛에 그야말로 찬란하게 금각사가 빛났다.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이 순간은 잊혀질 듯한 치명적인 아름다움. 그것이 금에 대한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애써 설득시켰지만. 후에 평등원의 봉황당을 보기 전까지 이 여운은 가시질 않았다. 이전에 여자친구가 왔을 때 금각사에 데려오지 못한 것이 한없이 미안해졌다.훗날 어머님을 모시고 다시 한 번 꼭 가야할 곳.
한 페이지 가까이 유 교수가 예찬을 하는데 그를 넘을 표현력이 나오질 않는다.
왜 사진이 항상 비슷한 구도로 금각사가 우측편에 위치하는지 궁금했는데 배치가 경호지 연못 때문에 동선이 한정되어 있어 청수사처럼 고정된 것이었다.
두 번이나 불에 탔던 금각사. 본래 1950년 소실 전의 금각사는 2층도 1층처럼 금박이 없고 3층에만 있었으나, 1955년 복원 때 2,3층 모두 금박을 입혔다. 소실 때가 아닌 창건 때 모습으로 복원했다는 것은 이 말이다.
다녀온 일본 문화재 거의 대부분이 불에 탔다가 재건된 것들이다. 자연재해나 방화를 제외하고 외침도 안받은 나라에서 내전이 참 많았다는 것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실 실제로 지금의 금각사는 채 100년도 되지 않는 유적지인데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 관광객이 과거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인가, 현재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만족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더 지향해야하는가. 무관심한 원래의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 사랑받는 이름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인가.
재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숭례문이 항상 먼저 떠오른다. 국보 1호가 처참하게 불에 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전국으로 생중계되고 그것을 보는 것.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보는 것과 다름없는 처참함과 짓밟힌 자존심. 그리고도 재건 당시에 목재 사용에 대해 쏟아지는 비리와 부실공사로 다시 불거지는 문제들.
아이러니하게 그 때 당시 문화재청장이 지금 글 쓰게 하는 동기를 주신 유홍준 교수였고, 숭례문 방화사건의 책임으로 물러나셨다. 잘못을 드러내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일본의 문화재들의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더 나은 방법으로 복원할 수는 없었을까. 이미 가짜가 되버린 것을. 일본에서 금각사 복원 성금으로 3000엔이라는 당시 큰 돈을 모은 것처럼 우리도 10억 가까운 성금을 걷은 것으로 아는데, 이것에 대한 행방이 묘연하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뉴스에 없다. 정부 예산으로 복원을 했다는데 그럼 이 돈은 어디로 간 것인가. 국보 1호가 불에 타고 부터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는 느낌이다.
절 내부를 들어가볼 수는 없지만 카메라가 상당히 먼 거리도 잘 잡아주어 찍어두었다. 아시카가 요시미츠로 추측되는 상이 있다.
항상 천편일률적인 사진만 있어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을 올린다. 사진이 많을수록 나의 글솜씨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자세히 기록이 되있어서, 어차피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점 외에는 문헌을 찾아 올리는 것이니 나의 글이 아니라 의미가 없다.
이 금각사의 금각, 은각사의 은각, 니시혼간지(西本願寺, にしほんがんじ)의 비운각(飛雲閣)을 '교토의 3각'이라고 부른다.
금각사에는 금각만 있는 게 아니라 역시 사찰이기 때문에 방장과 서원이 있다. 이 외에도 책에 소개된 석가정과 출구 쪽으로 더 가면 기념품을 파는 큰 건물도 있다. 석가정의 사진이 내가 본 곳과 달라서 의문이 있다. 내부에 걸려있는 서예 걸개도 완전히 다르고 실제로 안을 들어가 볼 수 없게 되있는데 사진은 유 교수가 직접 찍으신 건지 인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말 그대로 조촐하고 단아하다. 해질녘 노을을 보며 이곳에서 금각을 볼 수 있다면 문명의 혜택을 버리고 기꺼이 살라면 살겠다.
세계문화유산임에도 경내에 기념품 가게가 있다는 것이 한국과의 차이라고 해야할까. 일부러 서울의 선릉을 다녀왔는데 주위에 뜬금없는 일식당과 편의점과 모텔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화재 자체도 덩그러니 무덤과 제사지내는 단만 남아있어 외국인을 소개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어디를 가든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고, 특산물이나 지방의 다른 명물을 캐릭터화 하거나 콘텐츠를 개발해낸다. 그 덕분에 호기심을 자극하여 돈을 더 쓰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문화재와 지역을 홍보하는 수단이 된다. 입장료 - 관람의 만족 - 사진 - SNS - 소비로 이어지게끔 구성이 완벽하다.
제주에서도 안동 하회탈을 볼 수 있는 수준에서 적어도 내가 살아온 30년간 크게 바뀐 것을 느끼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우는 것들이 다시 재생산된다. 문화의 힘은 문화재에서부터 나온다. 기존에 갖고 있는 것에서 발전을 시켜야지, 무턱대고 새것을 창조해낸다고 능사가 아니다. 사실 창조라는 것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없다고 해야겠지.
교토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순서가 어떻든 반드시 우지 평등원과 금각사를 가보라고 자신있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