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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Oct 22. 2022

가늠하지 못했던 가능성

Lesson 6


 - 이번 주에 수업할 꽃들이요.

 스승님이 보내온 사진에는 컨디셔닝 된 꽃들이 물통에 꽂혀 있었다.

 - 이름은 카네이션, 튤립, 라벤더, 장미(웨딩피아노), 클레마티스, 델피늄, 프록스, 옥시, 공작초, 엘엔지움, 유칼립투스, 피토스포륨이에요.

어제가 그제 같고, 오늘이 어제 같던 6월의 평일에 도착한 문자가 반가웠다. 주말 레슨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중의 남은 시간들을 활기 있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기대가 컸던 탓일까? 꽃들의 색감 때문이었을까? 막상 스튜디오에서 꽃을 직접 마주했을 때는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작약이나 호접란처럼 존재감이 큰 꽃들 없이 어떻게 조합해야 할지 막연했다.

 

스승님이 웃으며 얘기했다.

“오늘은 ‘우와, 우와’ 소리를 안 하네요. 실망했어요?”

“아니요. 실망이라뇨.. 저는 ‘실망’이라는 단어 잘 안 써요. 사전에서 찾아보면 희망을 잃는다거나 뜻대로 안 돼서 마음이 몹시 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이 꽃들을 앞에 두고 할 소리는 아니죠. 다만, 또 낯설어요.”


“언니가 다양한 꽃들을 접할 수 있도록 신경 쓰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톤 다운된 보라색 카네이션을 준비해 봤어요. 염색된 꽃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매력적으로 느끼고, 어떤 사람들은 별로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언니도 그리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이렇게 염색된 꽃도 접해보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샀어요. 싫어하거나 수업에서 안 썼으면 좋겠는 재료들이 있으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맞아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런데 지난번 작약처럼 수업이 끝났을 때는 이 친구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을지 저도 궁금하네요.”


“이 튤립은 하늘색으로 염색된 거예요. 모든 튤립을 뒤집어서 쓸 수는 없는데, 이건 그럴 수 있어요. 잎이 꺾이거나 찢어지지 않게, 힘을 빼고 한 장씩 조심해서 살살 뒤집어주면 이렇게 돼요.”

“반전 매력이네요. 튤립은 모아진 모습으로만 생각했지, 이렇게 뒤집을 수 있다는 건 생각을 못했어요. 화형이 완전 달라지잖아요. 사진을 보면서 ‘이건 무슨 꽃이지?’ 하며 예쁘다고 생각했던 꽃이 튤립 뒤집은 거였네요.”


“베이지색 프록스도 참 매력적이죠? 저는 꽃을 구매할 때, 한 묶음에서도 진한 정도나 모양이 조금씩 다른 걸 선택해요. 이 프록스도 좀 더 연한 색감으로는 투명하고 청량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진한 색감의 꽃으로는 빈티지하게 연출하면 멋있을 것 같고요. 크기는 작지만 색감이 매력적이어서 존재감이나 활용도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겠어요.”

호기심 많고, 창의력 있는 스승님의 머릿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꽃들의 조합이 그려지고 있는 걸까? 두 눈을 반짝이며 설명하는 모습에서 생기가 묻어났다.


“빈 공간을 채울 꽃으로 보라색 톤을 고려해서 과꽃을 샀어요. 지난주에는 파란색으로 썼던 옥시를 이번에는 흰색으로 준비했고요. 델피늄은 어떻게 나눠 쓰면 좋을지, 클레마티스는 얼굴 방향을 어떻게 둘지 고민해 봐요. 이 꽃의 향기 좀 맡아보실래요?”

“아! 이게 라벤더구나. 향기는 익숙한데, 이렇게 줄기가 얇은 줄은 몰랐어요. 밭을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인 라벤더 사진을 보고 크기가 꽤 큰 줄 알았네요.”


“소재로는 유칼립투스랑 피토스포륨을 준비했는데, 엘엔지움은 컨디셔닝하는 방법 알려드리려고 그냥 뒀어요. 엘엔지움은 꽃처럼도, 소재처럼도 쓸 수 있는데 잔가시가 있어서 장갑을 끼고 가위의 등으로 살살 제거해줘야 하거든요. 너무 세게 해서 줄기가 상하면 안 되겠죠? 자, 이제 언니가 해 보세요.”


꽃에 대한 설명을 듣고, 스파이럴 연습을 했다. 내가 잡은 꽃다발을 수정해 주면서 스승님이 말했다.

“언니가 디테일에 엄청 신경을 쓰는 게 보여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요. 같은 종류의 꽃은 반드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나요? 보라색 카네이션도 이렇게 두 개를 모아주면, 전체적인 조화는 해치지 않으면 풍성한 느낌을 줄 수도 있어요.”


바구니를 완성하자 스승님이 물었다.

“어때요? 보라색 카네이션의 매력에 빠져들었어요?”

“빠져들었다는 표현까지는 과한 것 같고요.. 확실히 매력을 느낄 수는 있었어요.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관심 있게 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햇볕 잘 드는 어느 가을, 두어 송이 사다가 화병에 꽂아두면 그리운 사람이 생각나겠구나 싶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그래요.”

“표정만 봐도 알겠네요. 처음 들어설 때랑 달라요. 꽃이 좋아서 해맑게 웃는 특유의 모습이 살아났어요.”


“처음 재료들만 봤을 때는 이렇게 풍성한 모습으로 완성될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꽃의 양에 대한 가늠이 안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재료들이 이 정도로 예쁘게 조화를 이룰 거라는 생각도 못 했어요. 마치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량은 뛰어나지 않은데, 유독 호흡이 잘 맞아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오케스트라 같아요. 이 녀석들이 같이 노래를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언니가 매번 이렇게 행복해하니까 저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요.”


전에는 ‘내가 직관이 발달해서 사람을 잘 보잖아. 나는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바로 각이 나와.’라고 건방진 소리를 했었다. 눈에 보이는 꽃을 앞에 두고도 그 안에 어떤 가능성이 숨어 있는지 가늠을 못 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몇 마디 대화로 쉽게 재단하다니.. 나의 미숙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을까? 나의 섣부른 판단으로 흘려보낸 소중한 인연이 얼마나 많을까? 나의 편견이 얼마나 많은 성장의 가능성을 짓밟았을까?


내 마음과 생각이 꽃을 조금 더 닮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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