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 9
“오늘 준비된 꽃 중에 카네이션, 퐁퐁, 거베라, 헬리옵시스, 미니델피늄은 이제 익숙하시죠?”
“예. 그리고 연두색 수국이랑 보라색 도라지꽃도 알아보겠어요. 색감이 너무 예뻐요.”
“맞아요. 지난번에는 수국을 파란색으로 썼었어요.”
“토양이 산성인지 알칼리성인지에 따라 꽃의 색깔이 바뀐다고 했었죠?”
“예. 우리가 꽃으로 생각하는 건 꽃받침이고, 중앙에 조그마한 게 진짜 꽃이라는 것도 말씀드렸어요.”
“기억나요. 이래저래 재미있는 친구라 생각했거든요.”
“수국은 큰 꽃의 특징을 살려서 존재감 있게, 풍성하게 연출할 수도 있고.. 작게 나눠서 쓸 수도 있어요. 어떻게 쓰면 좋을지 생각해 보세요.”
“예.”
“나머지 재료들도 소개할게요. 천일홍, 여름라일락, 왁스플라워, 유니폴라(보리사초), 좁쌀풀이에요. 오늘은 제가 최대한 개입을 안 하고 지켜보려고요. 영어회화 개인 레슨을 받았는데, 그 선생님과만 대화가 되더라는 우스갯소리 들어보셨죠? 개인 레슨을 받으신 분들 중에 선생님이 없으면 꽃을 잘 못 꽂는 경우가 있어요. 선생님한테 너무 의존을 했던 거죠. 언니는 제가 없어도 완성된 작품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앗! 스승님 뜻은 고마운데, 첫 레슨 받았을 때의 막막함이 되살아나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즐겁게 해보세요. 언니의 취약점을 확인하고, 그것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다음 수업을 구성하면 좋잖아요.”
내가 아웃라인 잡는 것을 보더니 스승님이 슬그머니 꽃냉장고에서 흰색 장미를 몇 송이 꺼내왔다.
바구니를 다 만들자, 스승님이 피드백을 해 줬다.
“언니가 크기나 형태에 대한 감각이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자신이 만들 바구니의 전체 크기를 가늠하면서 기준점을 잡아 아웃라인 형태를 만들어야 하는데.. 생각 못 했죠? 주어진 꽃의 양에 비해 기준점이 큰 데다, 머릿속에 있는 아웃라인의 형태도 흐릿하니까 바구니가 엄청 커졌어요.”
사실 나는 피드백을 받으면서도 바구니가 크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집에 가져와서 늘 꽃 놓던 자리에 두고서야 실감했다.
“제가 언니를 좋아하는 마음에 꽃을 다양하고 풍족하게 드렸는데.. 학습적 효과를 위해서는 좀 더 단조롭고 야박하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준비하는 꽃의 종류와 양이, 언니가 다루기에는 버겁고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가 싶거든요.”
“저는 모두 좋아요. 스승님이 꽃린이를 너무 예뻐했네요. 스승님한테 다 계획이 있다는 걸 알고 신뢰해요. 야박하다고 섭섭해 하지 않을 테니까 저한테 맞게 진행해 주세요.”
피드백이 이어졌다.
“이건 맞고 저건 틀리다고, 칼로 무 자르듯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저라면 존재감이 큰 수국을 중앙에 두 개나 모아서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캘버트 크레리의『 플라워 스쿨 』이 생각났다. 책에서는 ‘꽃을 너무 많이 꽂으면 오히려 아름다움이 죽어버리고, 꽃 한 송이라고 무시하면 무엇인가 빠진 듯 미완성된 느낌의 꽃꽂이가 될 수도 있다. 꽃을 다루는 일은 예술적 재능만큼이나 절제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를 사로잡은 수국과 도라지꽃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 기술과 절제력이 부족한 나는 아름다운 녀석들의 매력을 오히려 떨어뜨렸다.
지금도 나는
“언니가 꽃들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알겠어요. 한 녀석 한 녀석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꽃들이 다 ‘저요! 저요! 여기 좀 봐주세요.’ 아우성치는 것 같아서 산만하고 부담스러워요. 더 강조하고 싶은 꽃을 다른 녀석들이 받쳐주도록 구성하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각 꽃들의 매력도 더 살릴 수 있어요. 작품에는 조연도 필요하잖아요."
라는 소리를 듣곤 한다.
꽃을 다루는 일에만 절제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연애를 할 때도 좋아하는 마음이 흘러넘치면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상대가 불편할 정도로 퍼붓는 애정은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운 것일 테니까.
아이들이 성장하느라 애쓰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데도 절제력이 필요하다. 안쓰러워서, 답답해서 ‘내가 하고 말지..’ 해버리면 아이들의 성장은 더 늦어진다.
그런데, 절제력도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길러지는 것 같다. 마음이든 꽃이든, 임계점을 지나 넘쳐흐른 것을 인식하고 ‘이러면 안 됐는데..’ 후회하며 배우는 것 같다. 눈물콧물 쏙 빼면서 배우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숱한 흑역사를 떠올리며, 문득문득 수치스러운 감정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경험들을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인다. 참지 못해 흘러넘쳤던 감정들과 그로인해 저질렀던 부끄러운 실수들을 통해, 절제의 감각을 조금씩 익힐 수 있었다고 위안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