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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chaela Dec 07. 2022

내년에 꽃이 다시 피지 않는다 하여도..

Lesson 11


- 다음 주에 여름휴가 가시죠? 그 다음 주는 꽃시장 휴가기간이에요.

  그래서 이번 주에 서양란을 심으려고요.

  더운 날씨에 꽃도 금방 시들고, 레슨 없는 기간에 집이 허전할 수도 있으니까..

  꽃 놓던 자리에 두고 보시면 좋을 거예요.

 

지난 수업 후, 꽃에 대한 학습적 의욕이 불타오르던 시기였다. 절화를 다루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앞섰다. 그러나 스튜디오에 들어가 비닐 포트에 들어 있는 서양란 두 대를 보는 순간, 아쉬운 마음이 사라졌다.

“스승님은 어떻게 매번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무언가를 눈앞에 펼쳐 놓아요? 서양란 심는다고 했을 때, 개업한 가게에 늘어서 있는 화분들을 생각했어요. 주로 하얀색이나 진분홍색을 봤던 것 같은데.. 이렇게 예쁜 색이 있었나? 이쪽 잎들은 정말 나비가 팔랑거리는 것 같아요.”


“제가 신경을 써서 고르긴 하지만, 언니의 반응이 유독 좋기도 해요. 아무래도 많은 꽃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있으면 돋보일 수 있죠. 지나가며 무심결에 보는 것보다 자세히 살피면 더 예쁠 테고요. 언니가 직접 심으면 애정도 생길 거예요.”

“난 벌써 애정이 생겼어요.”


“난을 심는 과정은 단순하게 생각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단순한 과정을 어떻게 풀어갈지가 참 재미있어요. 절화처럼 꽃 한 송이, 소재 한 가지를 나눠서 다룰 수 없으니까 난의 종류, 크기, 색깔, 줄기수를 정하는 게 중요해요. 기본적인 것들이 정해지면 변수가 많지 않을 것 같지만, 같은 소재라도 화기의 선정과 꽃의 배치에 따라 다양한 연출이 가능해요.”


“스승님이 준비한 화분이 마음에 들어요. 사각형이나 원형으로 정형화되지 않았는데, 라인과 형태가 멋스러워요.”

“그렇죠? 과천에 있는 화훼단지에서 샀어요. 거기에 큰 화분 가게가 있는데, 직접 제작한 거래요. 저도 좋아하는 화분인데, 언니도 이 녀석의 멋을 바로 알아보네요. 오늘 심을 난과도 잘 어울리죠?”

“꽃도 화분도 마음에 쏙 들어요.”


“서양란은 뿌리를 땅에 내리지 않고 나무나 이끼, 바위에 걸쳐 자생하는 착생란이라서 흙에 안 심어도 돼요. 나무껍질을 말린 바크에 심을 건데,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잘 자라니까 배수구멍이 없는 화분에도 심을 수 있어요. 물은 2주에 한 번 주면 되거든요? 우리는 2대를 심을 테니, 각 난의 뿌리 가까이에 종이컵 1컵 정도씩 부어주세요. 이래저래 더운 여름철에 두고 보기 좋은 친구랍니다. 물을 잘 주면 2~3개월 동안 감상할 수 있고요, 겨울에 얼어 죽지 않게 관리하면 내년에 다시 꽃을 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꽃대만 남은 게 보기 싫어서 대부분 사람들은 꽃이 지고 나면 버려요.”


“이제 비닐 포트를 벗기고 심을게요. 언니, 보세요. 난을 이쪽 방향으로 두고 심을 수도 있고 반대쪽 방향으로 두고 심을 수도 있어요. 어때요?”

“아하! 난을 심는 건 또 이런 매력이 있구나.. 어떻게 배치하는지에 따라 모습이 많이 달라지네요.”

“언니가 심고 싶은 모양대로 잡아서 고정하고, 바크를 채워주세요. 바크를 다 넣었을 때, 언니가 생각했던 모습과 미묘하게 차이가 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언니도 미세한 차이에 엄청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라서 미리 말씀드립니다.”

“하하, 스승님이 학생을 너무 잘 파악하고 계셔요.”


“바크를 다 넣었으면 꽃대가 부러질까 봐 고정해 놓은 지지대의 철사끈을 교체할 거예요. 지금 있는 빵끈타이가 갈색이잖아요? 그냥 둬도 상관없지만 번거롭더라도 초록색 스웨이드 끈으로 바꿔주면 좀 더 자연스러워요. 이렇게 바짝 묶어서 잘라주시면 돼요.”

“끈을 하나씩 묶을 때마다 애정지수가 높아져요. 이러면 없던 애정도 생기겠어요. 나는 주로 생각과 말로 사는 사람인데, 꽃을 다루면서 구체적인 대상물을 매만지며 애정을 쌓는 법도 배우고 있어요.”


“화분을 좀 더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해 이끼도 덮어주고, 장식돌도 놓아주세요. 이건 천기석이라는 돌이에요.”

“이렇게 두고 보니까 화분 모양이 배 같기도 해요. 제가 5월에 백령-대청-소청도로 배낭여행 다녀왔잖아요? 그때 백령도에서 유람선 타고 두무진 해안을 관광했어요. 같은 돌은 아니지만, 색감이랑 모양이 그곳을 떠오르게 해요. 이제부터 이 화분에 있는 천기석은 ‘백령이’라 부를 거예요.”


“잎에 광택 스프레이를 뿌리고 마무리할게요.”

“잎이 엄청 반짝거려요. 블링블링. 피부과에서 시술을 받은 것 같아요. 내가 정성껏 손으로 닦아서 이만큼 윤이 나게 만들고 싶은데..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리겠죠?”


난을 다 심자 스승님이 물었다.

“마음에 들게 심어졌어요?”

“예. 보는 위치에 따라 모습이 조금씩 다른데, 모두 마음에 들어요. 여기 보세요. 이쪽에서 보면 꽃 부분이 하트 모양처럼 보이지 않아요? 나의 애정에 이 녀석이 온몸으로 화답하는 거예요. 잎은 큰 새가 날갯짓을 하는 것도 같아요.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닌데, ‘사랑을 실은 자유로운 항해’ 가 이 작품의 주제가 된 거예요.”


“꿈보다 해몽이 좋아요.”

“내가 또 신나서 오버했네요.”

“좋아요. 경험이나 주제를 언어로 형상화하고, 그것을 꽃으로 표현하는 게 언니의 강점이 될 수도 있겠어요. 꽃으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거죠.”

“정말 그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집에 화분을 안고 들어왔더니

“내가 원래 난을 참 좋아해.”라며 엄마와 아빠가 더 좋아했다.

부모님이 ‘원래’ 난을 좋아하시는 줄,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

주제넘게 값비싼 취미를 즐긴다며 타박하지 않고, 함께 꽃을 예뻐하는 두 분과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다.

근심걱정 하나 없이 풍족하게 노년을 보내는 건 아니지만.. 소소한 욕심 내려놓고 좀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건강하게 70대를 맞이한 부모님처럼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다.


머리카락이 끈적끈적 들러붙는 삼복더위에는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는 것도, 그 꽃들이 초라하게 시드는 모습을 보는 것도 부담스럽다. 더웠던 여름, 난은 우리집 꽃 두던 자리를 단아하고 예쁜 모습으로 지켜줬다.

5개월이 지난 지금도 화분은 여전히 우리집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다. 꽃이 지고 큰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도 새 잎을 틔워낸 녀석이 어찌나 기특한지.. 작은 잎만으로도 사랑을 받기는 충분하다. 내년에 꽃이 다시 피지 않는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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