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 12
8월 초반의 여름휴가 기간이 지나고 중순에 접어들었다. 스승님이 문자를 보내왔다.
- 제일 더운 시기 잘 보냈어요?
- 그럼요. 통영 바다에서 물놀이하고, 맛있는 것 먹으며 즐겁게 보냈더니 힘이 불끈 솟더라고요.
스승님도 잘 보냈어요?
- 원래는 비수기인데, 계속 일이 있어서 바쁘게 지냈어요.
그래도 휴가 기간에 재충전 잘해서 즐겁게 작업했어요.
언니, 이번 주 토요일 아침에 시간 있어요?
- 예. 특별한 일은 없어요.
- 꽃시장에 함께 가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장을 보고 작업실에 와서 손질한 후, 간식 먹고 레슨을 진행하면 어떨까 싶어요.
- 저야 너무 좋죠. 시간과 장소 정해주면 맞춰서 갈게요.
“처음 꽃시장에 오면 당황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정신없죠?”
“맞아요. 정신이 없어요. 그래도 난생처음으로 왔을 때보다는 나아요. 새벽 꽃시장에 몇 번 왔었거든요. 레슨 받기 전에요.”
“언니는 정말 꽃에 진심이네요.”
“무작정 네비에‘고속버스터미널’을 찍고 왔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그야말로‘시장통’이 눈앞에 펼쳐지잖아요. 양동이에 들어 있거나 한쪽에 쌓여 있는 장미들을 보는데.. 내가 배추, 파, 열무를 사러 전통시장에 온 것 같았어요.”
“하하, 전에는 예쁘게 관리된 꽃들만 봤을 테니까요. 그때 뭐 샀는지 기억나요?”
“아무 계획이 없던 터라 뭘 어떻게 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구경하면서 몇 바퀴 돌다가, 쭈뼛쭈뼛 ‘저 꽃은 얼마예요?’ , ‘이것 주세요.’ 했어요. 꽃이름이 익숙하지 않아서, 말하는 게 부끄러웠어요. 잘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분홍색 거베라가 유독 예뻐 보이기에 먼저 사고, 하늘색 옥시가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달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이름도 모르는 초록색 소재를 두어 종류 샀어요. 레슨 받고, 꽃들의 이름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도 참 좋아요.”
“컨디셔닝은 잘 했어요?”
“컨디셔닝을 한다는 개념이나 있었나요? 여기서는 꽃들을 신문지나 큰 종이에 둘둘 말아 주잖아요? 집에 가자마자 고대로 펼쳐놓고 잘라서 화병에 꽂았어요. 어떤 부분을 자르고 어떤 부분을 남겨야 하는지, 잎은 손으로 뜯어도 되는 건지.. 유튜브라도 참고할 만 한데, 그때는 그런 생각도 못 했어요. 그냥 직관적으로 예쁘게 꽂으려고만 했던 것 같아요. 재료가 많았는데, 다 만들고 나니까 중간 크기 화병 하나 남더라고요. 스승님이었으면 같은 크기 화병을 세 개는 만들었을 거예요. 잎을 제거하고 물통에 넣어서 물올림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어요. 꽃이 시들시들한 것도 싱싱하지 못한 꽃을 사서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내가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나쁜 꽃만 팔았다고 사장님들 욕도 했는데.. 꽃들이 나중에 화병에서 생기를 찾더라고요.”
“오늘 우리는 초록 소재를 중심으로 조합할 거예요. 보통 소재는 다른 꽃들을 돋보이게 하거나 바탕의 역할을 담당하잖아요? 러프하고 자연스럽게 연출하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들판에 핀 작은 꽃들을 마주할 때의 느낌이랄까? 스파이럴로 크게 다발을 만들어 유리 화병에 넣으면, 더운 여름에 두고 보기에도 시원해서 좋아요. 제가 생각한 컨셉대로 장을 보긴 할 텐데, 보시면서 마음에 드는 친구가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어울릴 것 같으면 함께 데리고 가게.”
설유화잎, 이끼시아열매, 강아지풀, 미국자리공, 마타리를 사고 스승님께 물어봤다.
“구슬아이스크림처럼 생긴 보랏빛 꽃이 아까부터 눈에 들어와요. 이름이 뭐예요?”
“언니가 귀한 꽃을 알아보네요. 여름 한 철에만 만날 수 있는 금꿩의다리예요.”
“아하!! 이게 금꿩의다리구나. 이름이 재미있어서 궁금했는데, 이거였구나. 많은 플로리스트들이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네요. 눈에 띄어요.”
“안 그래도 언니 눈길이 계속 가던데, 이 친구는 꼭 데려가야겠네요. 줄기가 꿩의 다리처럼 생겼어요. 속이 텅 비어서 자를 때 색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바닥에 떨어질 때는 통통 소리를 내요. 작은 구슬처럼 동그랗게 생긴 꽃망울이 터지면, 그 속에 황금색 수술이 빛나서 이름에 ‘금’ 자가 붙은 거래요.”
“레슨 받을 때마다 친구를 새로 사귀는 것 같아요. 오늘 금꿩의다리랑 친해지면, 내년 여름에는 이 친구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를 수 있겠어요.”
“최소 1년 정도? 언니의 감각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레슨을 꾸준히 진행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런데, 일정을 맞추기 어렵거나 사정이 생겨서 오랫동안 꽃을 다루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는 그동안 레슨 받았던 것들 중에 다시 해보고 싶은 색감이나 스타일을 정해서 어레인지 해보세요.”
“정말 스승님은 다 계획이 있으셔. 장 보는 것도 레슨의 연장이네요.”
“처음에는 꽃을 고르는 것도 어려울 거예요. 오래 볼수록 고르기 더 어려우니까 시간을 정해놓고 보세요. 1시간 이내로요. 먼저 쭉 한번 둘러보고 마음속으로 정한 꽃을 구입하는 거예요. 이 꽃도 예쁘고, 저 꽃도 예쁘고.. 무작정 사다 보면 돈을 너무 많이 쓰게 되니까, 재료비도 기준을 잡아두세요. 시간이나 비용을 더 많이 투자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에요. 컨셉을 정해 놓고, 한정된 시간과 자원 안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연습을 하는 게, 언니의 성장에도 더욱 도움이 될 거예요. 저는 처음에 꽃은 안 사더라도 그냥 자주 들렀어요. 여기 있는 꽃들을 보면서, 어떤 조합이 가능할지를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했어요.”
“또 꿀팁을 방출해주시네.”
“오늘도 제가 이야기한 대로 장을 본 거예요. 저는 생각지도 못했던 코스모스가 나온 게 눈에 띄네요. 금꿩의다리랑 코스모스 사서 작업실에 가요.”
작업실에서 꽃들을 손질해 물올림을 한 후, 레슨을 받았다.
첫 번째 스파이럴 연습 후, 스승님의 피드백이 이어졌다.
“크게 다발을 만들기가 쉽지 않죠? 이렇게 소재를 중심으로 어레인지 할 때는 잡초처럼 지저분하게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해요. 언니는 가뜩이나 서툰데, 다음번에 연습할 것을 고려해서 재료를 그냥 쓰려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저희 지금 재료 충분해요. 두 번째 연습은 염두에 두지 말고, 지저분한 부분은 자르고 정리하면서 작업해요. 완성도를 고려하면서. 항상, 지금 하는 작업을 최선의 결과물로 마무리하겠다는 자세로 하세요.”
“어쩜 그렇게 정곡을 찌르실까.”
두 번째로 다발을 만들었을 때, 스승님이 말했다.
“이것 봐요. 훨씬 좋잖아요. 다발이 큰데, 수정이 별로 필요 없네요.”
“스승님은 노량진에 갔으면 1타 강사가 됐을 거야. 갑자기 성적이 수직상승한 느낌이네요.”
“오랜만에 하는 레슨이라서 걱정했는데, 스파이럴 잘했어요. 언니가 마음을 쓰는 덕인 것 같아요. 아직 포장은 하기 어려울 거예요. 제가 하는 걸 보면서, 언니라면 어떤 재질이나 색감으로 포장을 할 건지 생각해 보세요. 저한테 여름 분위기 나는 장식용 돌이랑 조개껍데기가 있으니까 유리화병에 넣고 마무리해요. 두고 보시면서 지칠 때마다 시원하게 통영 바다도 떠올려 보시고요.”
집에 와서 며칠이 지난 후, 스승님께 문자를 보냈다.
- 바다 느낌이 나는 화병도 좋고, 초록 소재가 중심이 되는 다발의 매력도 너무 좋은데..
노란색 마타리 녀석의 냄새가 영 거시기해요.‘꽃에 거름이 묻었나?’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검색했더니, 인분냄새가 나는 꽃이래요.
- 그래요? 언니 덕분에 저도 배우네요. 다음에 쓸 일이 있으면 꼭 참고해야겠어요.